[장영희칼럼]​ 갑질과 혈구지도

2017-09-07 20:00

장영희칼럼

[사진=장영희 시청자미디어재단 서울센터장·경제학박사]


갑질과 혈구지도

육군대장의 공관병 ‘갑질’을 보며 한 소설이 떠올랐다. 1987년 이문열이 쓴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 소설은 1950년대 말 소도시의 한 시골 초등학교에서 부정한 방법으로 친구들 위에 군림하는 엄석대라는 인물을 통해 권력의 형성과 몰락 과정을 흥미롭게 그려냈다. 학급 대장인 담임 선생님은 자신의 권위와 힘을 참칭하는 엄석대를 시종일관 비호했다. 엄석대의 횡포는 새로운 담임 선생님이 와서야 끝장이 났다. 육군대장의 갑질도 그가 여러 보직을 거치는 동안 자행되었지만, 새로운 권력이 들어서고야 철퇴를 맞았다.
최근 접한 사례는 육군대장같이 높은 지위에 있거나 무슨 대단한 권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어도 갑질하는 자가 우리 사회에 널려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기관의 한 중견간부는 부하 직원에게 폭언과 욕설, 위협을 일삼았다. 심지어 정치적 성향으로 편을 가르고 충성과 굴종을 강요했으며 자신이 세운 질서에 도전하면 뒤에서 기관장을 움직여 불이익을 주었다는 것인데, 현실의 엄석대 아닌가 말이다. 이 기관의 피해 직원들은 들고 일어나 파면을 요구하는 등 똘똘 뭉쳐 싸우고 있다.
'갑질'은 원래 계약법에서 계약체결의 당사자인 갑방(甲方)과 을방(乙方)을 가리키는 갑을에서의 ‘갑’에 어떤 행동을 뜻하는 접미사인 ‘질’을 붙여 만든 말이다. 권리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갑이 약자인 을에게 가하는 부당 행위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직장인이나 하청업체, 대리점주 등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자주 등장하는 갑질 당한 유형은 대체로 이렇다. 우선 을이 해야 하는 업무 외에 과외의 일이나 사적인 일을 요구한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시키는 대로 따르라고 호통친다. 일방적인 일정 제시로 야근이나 주말근무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일을 시키는 과정에서 반말이나 욕설을 일삼고 심지어 인격무시를 넘어 신체적 폭력도 가한다. 명절 떡값이나 회식비 등 갖은 명목으로 금품과 향응을 요구하면서도 을에게 정당하게 주어야 할 대금은 늑장 지급하거나 애를 먹인다.
갑질하는 이들은 아마도 이런 부류 아닐까. 공과 사를 구분할 줄 모르고 조직의 이익보다 사익을 꾀한다. 권리관계에서 우위에 서게 하는 조직의 힘을 개인 역량과 혼동해 자기가 잘난 줄 안다. 업무상 역할이 다를 뿐인 을을 하인쯤으로 여긴다. 뭔가 일이 잘못되면 을에게 책임을 떠넘긴다. 배경이나 맥락에 대한 설명 없이 복종을 강요하는 통제욕구가 강하다.
갑질은 거창하게 말하면 헌법 위반 행위다. 대한민국 헌법 11조는 평등권을 보장하고 있다. 1항은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항에는 ‘사회적 특수계급 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고 되어 있다.
이처럼 갑질 비판의 핵심은 근거 없는 불평등에 있다. 절대적 평등은 이상일 수 있지만 현실사회에서 존재하는 불평등 가운데 정당화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평등은 별다른 정당화가 필요하지 않지만, 타당한 이유를 댈 수 없는 불평등은 그 자체가 부당하고 정의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갑질은 인신예속적 행위라는 점에서 갑질이 횡행하는 사회는 봉건제와 다름없다. 자유와 평등을 기본가치로 삼는 민주사회에서 갑질이라는 봉건적 신분사회의 유습은 형용모순일 수밖에 없다.
한국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숱한 갑질 사례 가운데 ‘기업형’은 차라리 제어가 덜 어려울 수 있다. 본사가 대리점에 저지르는 부당한 횡포나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가하는 단가 후려치기와 기술탈취 같은 갑질은 관련 법규가 뚜렷하고 이를 막을 책무가 부여된 공적 기구도 있다. 대표적인 기관이 공정거래위원회다. 비록 엊그제 공정위 내부의 갑질이 터져나와 체면을 구겼다지만, 환부를 숨기기보다 드러내는 곳이 건강한 조직이다.
공정위는 가맹사업과 유통업, 하도급, 대리점업이라는 4대 갑을관계 개혁영역에 대해 김상조 위원장을 중심으로 꽤 애쓰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도급법과 가맹법, 대리점법 등 현행법의 엄정한 집행으로 김 위원장의 바람대로 을의 눈물을 닦아주기를 기대한다. 공정위 외에도 현실의 비대칭적이고 불합리한 관계를 보정하는 장치로 국가인권위원회와 국민권익위원회, 노사정위원회와 노동조합, 그리고 검찰과 경찰, 법원 등이 있다. 이들이 제 기능을 한다면 갑질은 상당 정도 누그러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제도적 장치로 갑질이 근절될 수 있을까. 만약 누군가 “당신은 갑질을 한 적이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완벽하게 아니라고 부정할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금수저의 ‘태생적’ 갑질, 성공과 출세로 자기보다 처지가 못한 이들을 업신여기는 ‘보상적’ 갑질보다 훨씬 더 많은 경우가 ‘인격파탄형’ 갑질이라고 하니 갑질은 평소 쌓은 인격의 결과가 맞는다. 16대 미국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Abraham Lincoln)의 경구도 있지 않은가. “만약 당신이 한 인간의 인격을 시험해 보려면 그에게 권력을 줘 보라(If you want to test a man's character, give him power).”
한가롭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 대목에서 <대학(大學)>에 나오는 ‘혈구지도(絜矩之道)’를 강조하고 싶다. 혈구는 곱자로 잰다는 뜻인데, 자기 마음을 잣대로 타인의 마음을 재고, 나의 심정을 기준으로 타인의 처지를 헤아리는 사람 대접의 자세가 바로 혈구지도이다. 제 마음을 표준 삼아 남의 마음을 추측한다는 ‘추기급인(推己及人)’이나, 내가 원치 않는 것은 남에게 베풀지 말라는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과 의미가 상통한다. 이처럼 선현들은 주종관계의 봉건적 질서가 뿌리 깊었던 그 옛날에도 신분적 갑질을 경계했다.
굳이 갑을관계의 셈법으로 나누자면, 우리는 살면서 갑이 되기도 하고 을이 되기도 있다. 한 시점에서 동시에 갑과 을의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을의 처지일 때 갑의 횡포에 기생·부역하거나 불이익을 당할까봐 비굴해지지 않았나 돌아볼 일이다. 공동체의 안녕과 건강성을 망가뜨리는 갑질에 단호하게 맞서되, 갑질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스스로 근신할 일이다.
갑질은 인간을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아니라 ‘호모 데멘스(Homo Demens)’로 이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