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영걸칼럼] 경영민주화가 우선돼야, 재벌 먹이사슬부터 끊어라

2017-07-04 20:00

윤영걸칼럼
초빙논설위원

[사진=윤영걸]


의사결정의 투명성, 경영민주화를 생각할 때다


 총수가 연루된 삼성그룹 뇌물사건은 안타깝게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검찰 주장처럼 부정부패라고 하기보다는 오너에게 감히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한국적 분위기가 만들어낸 슬픈 자화상이 아닐까.
청와대가 직접 나서 최순실의 딸 정유라씨에 대한 승마지원을 요청했으니 한국적인 현실에서 단칼에 거절하기 쉽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삼성이 좀 더 치열하게 고민했다면 빠져나갈 방법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면 삼성전자 사장이 독일까지 날아가 최순실과 직접 거래하지 않고, 승마협회나 마사회와 같은 단체를 거쳤다면 어땠을까. 언론이 보는 앞에서 승마 지원을 위한 협약식을 가졌다면 모르긴 해도 모범적인 사회공헌 활동으로 칭송받았을 것이다. 글로벌기업이 433억원에 달하는 자금을 지원했는데도 그룹 내 공식적인 의사결정기구를 통한 흔적이 없다. 요즘 재판에서 삼성 임원들이 일제히 증언을 거부하고 있다. 행여 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총수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라고 한다.
삼성그룹은 회장 비서실 출신이 유독 강한 파워를 갖고 있다. 한때 계열사 사장 중 절반 이상이 비서실 출신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만큼 오너에 대한 충성심이 임직원의 평가에서 중요한 잣대가 된다. 이병철·이건희 회장으로 이어지는 오너의 강력한 카리스마는 과감한 투자와 스피드 경영을 가능케 했다. 놀라운 성과도 거두었다. 그러나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리더십은 잘못된 길로 접어들면 걷잡을 수 없는 위험을 초래하기 쉽다.
 역시 대기업인 SK는 최태원 회장이 2016년 2월 16일 박근혜 당시 대통령을 만나기 전 임원들과 여러 차례 준비회의를 열었다. 회동 이후 청와대로부터 ‘빡빡하게 군다’는 핀잔을 들어가며 비덱스포츠(독일 소재 최순실 개인회사)에 대한 50억원 해외 송금요구에 불응했다. 물론 최태원 회장이 두 차례나 투옥된 경험이 있어서 몸사림이 있었겠지만 법률적인 리스크를 감안하지 않았을 리 없다. 총수의 구속 여부를 가른 삼성과 SK의 차이는 한마디로 조직 내 건강한 의사결정 시스템이 어느 정도 작용했느냐 하는 것이다. 적어도 국정농단 사태에 대응하는 방식에서는 말이다.
함영준 오뚜기식품 회장은 지난해 함태호 명예회장이 별세하자 상속세 1700억원을 모두 납부(5년 분납)키로 했다. 반면 김홍국 하림회장은 영세한 축산농가의 희생을 바탕으로 10조원(자산 기준)대 규모로 그룹을 성장시켰는데도 불과 100억원의 증여세를 내고 대학생인 25세 아들에게 사실상 그룹을 넘겨 편법승계 논란의 한복판에 섰다. 증여세 100억원마저 회사가 유상감자를 하면서 그 대가로 아들에게 100억원을 지급한 것이니 땅 짚고 헤엄치기 식으로 그룹을 통째로 넘겨준 셈이다. 네티즌들은 정직한 기업 오뚜기를 ‘갓(God)뚜기’로 부르지만, 하림은 ‘갓뎀(goddam, '빌어먹을'이라는 비속어)’이라며 비난한다. 오뚜기와 하림그룹의 대조적인 모습은 총수 1인이 군림하는 기업지배구조가 우연한 선의에 의존하는 한계를 보여준다. 회장이 세종대왕이라면 좋겠지만 연산군이나 광해군이라 해도 막을 방법이 없으니 문제다.
납품단가 후려치기, 친인척에 계열사 물량 몰아주기, 편법 승계 등 대부분 재벌의 문제는 재벌회장에 대한 효과적인 견제시스템이 없는 데서 출발한다. 전문경영인은 오직 오너의 눈에 들어서 자리 보전과 승진을 하는 것이 최대의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회장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뜻을 받들어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최선의 처세술이다. 반면 오너는 탈법과 편법을 통해 얻는 이익이 너무 막대하다. 그러니 ‘탐욕스런’ 오너와 ‘무책임한’ 전문경영인의 먹이사슬 구조가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사실 경제민주화보다 더 급한 것이 경영민주화다. 구글 등 미국 대기업들은 엘리트 직원들의 집단지성이 발휘되는 구조이지만, 우리는 경영진의 잘못된 의사결정이 구성원의 창의력을 막는다.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에 맞게 21세기 황제를 견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자는 것이 재벌개혁이다. 불과 5~10% 지분도 못 미치는 회장 일가가 회사를 개인재산처럼 좌지우지하는 것은 자유민주주의 시장원리에도 맞지 않는 일이다.
오너의 전횡을 막으려면 이사회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 기업에서는 회장의 뜻에 따라 이사회를 구성하다 보니 유명무실하게 운영되고 있다. 자산 2조원이 넘는 대기업은 3명 이상 사외이사를 둬야 하고, 이들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이사회와 감사위원회를 둬야 한다. 막강한 권한을 발휘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있지만 실제로는 회장의 뜻에 따르는 거수기 노릇만 하고 있다.
새 정부 들어 검찰,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이 나서 기업의 불공정한 갑질과 대주주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강력한 규제의지를 밝히고 있다. 암수술을 할 때는 암세포를 정확하게 찾아 떼어내야 한다. 자칫 멀쩡한 세포에 손을 댔다가 상태를 악화시킬 수 있다. 재벌개혁의 핵심은 재벌오너와 전문경영인의 잘못된 먹이사슬을 끊고, 기업 내부의 감시와 견제 시스템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가 되어야 한다. 변화의 주체는 기업과 기업인 자신이 되어야 한다. 지금 당장 변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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