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2017-06-11 15:32
차일혁, 빨치산으로 빨치산을 잡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남정옥(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 문학박사)= 빨치산 토벌대장으로서 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의 특징 중 하나는 ‘빨치산으로 빨치산’을 토벌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방식을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작전에 일찍부터 적용했다.

 차일혁이 그만큼 병법에 능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를 위해 차일혁은 빨치산 귀순자 및 전향자를 대상으로 한 특수부대 격인 ‘빨치산부대’를 조직하여 운영했다. 바로 빨치산으로 이루어진 수색대와 사찰유격대였다. 최초 수색대에는 ‘인공(人共, 조선인민공화국의 준말)시절’ 주로 북한의 앞잡이역할을 했던 치안대원이나 빨치산들을 포함시켜 작전을 수행했는데, 나중에는 수색대 전원이 귀순한 빨치산들로 채워져 갔다. 사찰유격대는 처음부터 순수하게 빨치산들로 구성된 부대였다. 나중에는 반공포로로 편성된 618부대도 운용하여 빨치산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차일혁은 직책을 옮길 때마다 이들 ‘빨치산부대’를 유용하게 활용하여 토벌작전에서 커다란 성과를 거두었다.

 차일혁이 빨치산으로 빨치산을 잡는 토벌작전은 대성공이었다. “빨치산만큼 빨치산을 잘 아는 사람은 없다”고 판단한 것이 주효(奏效)했다. 차일혁의 그런 판단이 적중했던 것이다. 차일혁이 수 없이 많은 토벌작전을 수행하면서도 대원들의 커다란 희생 없이 빨치산 토벌작전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바로 이들 ‘빨치산부대’를 효과적으로 운영했기 때문이다. 차일혁의 경이적인 빨치산토벌 전과에 대해 하루는 전북 임실출신의 국회의원이었던 엄병학(嚴秉學)이 그 비결을 물었다. 차일혁은 “저는 항상 빨치산의 입장이 되어서 빨치산 토벌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보다 효과적인 작전을 펴곤 합니다.”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었다.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작전의 본질을 꿰차고 매번 작전을 수행했다. 그리고 남보다 훨씬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차일혁은 6·25전쟁과 전후를 통해 제18전투경찰대대장, 철주부대장, 무주경찰서장과 임실경찰서장,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 제2연대장 직책을 수행하면서 빨치산으로 구성된 수색대와 사찰유격대를 활용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차일혁은 그만큼 이들 빨치산 출신으로 구성된 부대를 소중히 여겼다. 차일혁이 수행한 중요 작전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희생과 노력이 크게 작용했다. 빨치산으로 있을 때는 ‘악명’을 떨쳤던 빨치산들도 일단 차일혁 부대에 들어오면, 역으로 빨치산토벌에 앞장서며 빨치산을 때려잡는데 용맹을 떨쳤다. ‘이이제이’ 전법(戰法)의 완벽한 성공이었다.

 수색대와 사찰유격대에 소속된 과거 빨치산들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차일혁의 인간적인 친화력과 지휘관으로서 특출(特出)난 지휘 및 통솔력 덕분이었다. 그렇기에 야생의 맹수처럼 활개치며 날뛰던 그들이 과거 ‘사상적 동지’였던 빨치산들을 과감히 저버리고, 차일혁 부대의 선봉에 서서 빨치산 토벌에 혈안이 됐다. 이들 덕분에 ‘빨치산총수’인 남부군사령관 이현상(李鉉相)의 소재를 파악하여 사살할 수 있었고, 전북지역에서 악명을 떨치며 주민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외팔이부대장 이상윤도 결국은 사살할 수 있었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이 최초 빨치산토벌대장을 할 때의 수색대는 치안대원들로 구성했다. 작전초기에는 귀순한 빨치산이나 생포한 빨치산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일혁은 북한이 남한지역을 점령할 때 치안대원들도 수색대를 만들었다. 치안대원 출신으로 편성된 차일혁의 수색대는 따발총, 북한군 모자와 복장으로 꾸며 입고 빨치산으로 가장하여 적의 동태를 탐색했다. 빨치산들로 편성된 수색대를 만들기까지 차일혁은 이들 치안대원으로 이루어진 수색대를 통해 작전을 수행하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차일혁은 토벌작전 과정에서 귀순하거나 전향한 빨치산들 가운데 전투력이 뛰어난 자를 선발하여 수색대원으로 보충해 나갔다. 그렇게 해서 차일혁이 토벌대장으로 명성을 날리게 했던 수색대에는 빨치산 출신의 ‘용맹스런 대원’들이 여럿 있었다.

 그 중 한 명이 차일혁 부대의 사찰유격대장과 수색대장으로 크게 활약했던 김용식이다. 김용식은 무주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이었다가 체포되어 경찰로 전향했던 인물이다. 김용식은 본래부터 북한 ‘인민군’ 출신이 아니었다. 그는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야심차게 단행했던 인천상륙작전 이후인 ‘9·28서울수복’ 때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북한군에 의해 끌려가다가 빨치산 활동을 하던 중 체포됐다. 같이 생포당한 빨치산들은 현장에서 모두 사살됐으나, 김용식 만이 당시 무주경찰서장이던 김두운의 선처로 겨우 목숨을 건졌다.

 발이 빠르고 다부진 몸매의 김용식은 의경(義警)으로 채용되어 빨치산 토벌에 많은 공을 세웠다. 산속 지리에 밝고 빨치산 전법을 잘 알고 있던 김용식은 빨치산 토벌에 공을 세우고 정식 경찰로 채용된 뒤, 귀순자 또는 생포 공비들로 구성된 사찰유격대를 지휘하게 됐다. 평소에는 말을 더듬어 주위사람들에게 놀림을 받기도 했지만 대원들을 지휘할 때는 전혀 말을 더듬지 않는 특이한 행동의 소유자였다.

 차일혁이 무주경찰서장으로 부임하고 김용식을 중용했다. 차일혁이 빨치산토벌 작전을 펼칠 때 믿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사찰유격대장 김용식이었다. 사찰유격대는 대부분 빨치산 귀순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은 김용식 순경의 지도로 군기가 잘 잡혀있었다. 차일혁은 김용식 순경을 사찰유격대장에 임명하고 경사 진급을 전북도경에 건의하여 관철시켰다. 그날부터 차일혁은 대원들을 연병장에 집합시켜 훈련에 들어갔다. 먼저 구보부터 시켰다. 빨치산을 잡기 위해서는 지구력이 필요했고, 지구력을 위해서는 구보만한 것이 없었다. 차일혁은 경찰서장이 아니라 훈련소 조교처럼 서원들을 맹훈련시켰다. 자신이 이끌고 함께 싸울 부대는 자신이 직접 가르치고 훈련시켰다. 차일혁 만의 독특한 훈련방법이었다.

 임실경찰서장 시절에도 차일혁은 관내에서 암약하며 주민들을 괴롭히던 외팔이부대를 소탕할 때도 김용식의 사찰유격대를 활용하여 크게 성공했다. 차일혁은 임실경찰서장으로 부임한 후 관내 빨치산보다 전투력이 떨어진 토벌대의 전투력을 높이기 위해 서원(署員) 중에서 과거 빨치산을 한 명이라도 사살한 경력이 있는 30명을 선발하여 사찰대에 합류시켜 별동대를 만들었다. 그렇게 해서 사찰유격대는 53명으로 늘어났다. 차일혁은 사찰유격대장에 김용식 경사를 임명했다. 차일혁이 빨치산 토벌을 하는데 있어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부대가 사찰유격대였던 것이다. 차일혁은 사찰유격대를 지휘하여 결국 외팔이가 지휘한 ‘항미연대’를 완전소탕하고 부대장 이상윤을 사살할 수 있었다.

 외팔이부대장 이상윤을 사살할 때는 외팔이부대원으로 있다가 귀순한 이기봉을 적극 활용했다. 이기봉은 관내에서 악명을 떨치던 빨치산이었다. 생포된 이기봉은 임실에서 잦은 살인방화를 자행한 자였다. 그런 이기봉을 김용식 경사가 차일혁에게 사찰대원으로 편입시키자고 했다. 차일혁은 김용식이 큰 전과를 올린지라 그 요청을 쾌히 승낙했다.

 이기봉이 전향한지 얼마 안 된 어느 날 차일혁이 임실 면장과 함께 관내를 둘러보는데, 이기봉 전향사실을 모르고 있던 면장이 차일혁을 보고 “최근 생포한 ‘빨치산 이기봉’을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고 물었다. 차일혁이 차 뒷좌석에 앉아 카빈소총을 들고 있는 이기봉을 가리키며, “이 사람이 바로 이기봉”이라고 하자, 면장은 놀라 실신하고 말았다. 그만큼 이기봉은 임실에서 악명을 떨치던 빨치산이었다. 그런데 차일혁에게 귀순한 이기봉은 외팔이부대장 이상윤을 체포하는데 누구보다 적극적이었다. 결국 차일혁은 외팔이부대장 이상윤의 개인 습성이나 전투행동을 잘 알고 있던 이기봉의 도움을 받아 그를 사살했을 뿐만 아니라 이상윤이 지휘하던 항미연대도 함께 소탕할 수 있었다.

 차일혁이 빨치산 토벌대장 직을 수행하면서 운영했던 수색대와 사찰유격대는 정전협정 체결 후에도 빨치산토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차일혁이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 제2연대장으로 영전하여 지리산에서 마지막으로 저항하고 있던 남부군사령관 이현상과 빨치산 잔당들을 소탕할 때도, 차일혁은 빨치산 귀순 및 전향자들로 구성된 수색대와 반공포로로 편성된 618부대를 투입하여 빨치산 토벌작전을 성공으로 이끌 수 있었다. 차일혁은 마지막 토벌 때까지 빨치산으로 빨치산을 잡는 ‘이이제이’ 방식을 적용했다.

 특히 빨치산으로 구성된 수색대 대원들은 이현상 사살의 일등공신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현상이 사살됐을 때 ‘이현상이라는 것’을 최종적으로 확인시켜줬다. 빨치산으로 빨치산 총수 이현상을 죽이고, 이현상 얼굴을 알고 있는 빨치산을 통해 이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현상을 확인했던 빨치산은 최근 생포되어 차일혁에 의해 수색대에 편입됐던 이현상의 7인의 호위병이었던 김은석과 김진영이었다. 이때 차일혁의 수색대는 대원 33인 중 빨치산 출신이 아닌 자는 최순경(崔順庚)이라는 대원 한명 뿐이었다. 그럼에도 수색대원 중 차일혁을 배신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차일혁 특유의 독창적인 지휘통솔력이 돋보이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 땅의 빨치산들은 그렇게 하나씩 자신이 선택한 운명 속으로 사라져갔다. 한때 남한지역을 공포와 혼란에 떨게 하며, “낮에는 인민공화국, 밤에는 대한민국”을 가능케 했던 빨치산들의 말로는 비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에는 군경(軍警)으로 이루어진 토벌부대와 빨치산 간의 전쟁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빨치산 토벌작전은 ‘북한으로부터 버림받은 골수(骨髓) 빨치산과 전향(轉向)한 빨치산간의 전쟁’으로 변했다.
그렇게 볼 때 이 땅에 존재했던 빨치산들은 “빨치산에 의해 일어났고, 빨치산에 의해 종말을 고하게 됐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차일혁은 전향한 빨치산을 통해 빨치산을 완전 소탕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영산(靈山) 지리산을 포함하여 대한민국 후방지역을 빨치산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켰던 전쟁영웅이자 호국의 인물로 우뚝 서게 됐다. 차일혁이 그렇게 되기까지에는 “어떻게 하면 빨치산을 토벌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해법을 갖고, 빨치산토벌대장 직책을 수행했던 차일혁의 뛰어난 군사적 소양(素養)과 지휘능력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