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窓] 쾌도난마(快刀亂麻)와 협치
2017-05-22 23:59
양은 잘 드는 칼 한 자루를 들고 와서는 헝클어진 삼실을 싹둑 자르며 "어지러운 것은 베어버려야 합니다"고 아버지 앞에서 당당히 말했다. 그가 남북조시대 북제의 초대 황제가 되는 문선제다. 쾌도난마(快刀亂麻)란 성어의 유래다.
새 정부 출범 10여일이 됐다. 요즘 들어 쾌도난마란 말이 부쩍 많이 등장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비정규직 제로시대 선언, 세월호 참사의 재조사와 기간제 교사 순직 인정, 30년 이상 노후 석탄화력발전소 일시 가동 중단, 국정 역사교과서 폐지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다.
"뉴스의 속도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트위터 hel***) 새 정부 출범 일주일을 맞은 시점에, 네티즌들의 가장 큰 공감을 얻은 한 줄 평이다. 국민들은 큰 기대를 드러냈다.
하지만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 했던가. 일각에선 벌써부터 "지나친 거 아니냐"는 불평이 나온다.
인천공항공사가 "비정규직 1만명 전원을 연내 정규직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히자, 여기저기서 정규직으로 전환해 달라는 요구가 봇물 터지듯 나왔다. 자동차, 조선업 등 비정규직 비율이 높은 민간 제조업 분야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당장 우정사업본부 소속 집배원·택배원, 학교 보조원, 간호조무사 등이 직간접으로 ‘완전 정규직’을 요구했다.
광역지방자치단체는 본청과 산하 공공기관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바꾸는 데 속속 동참했다. 대구, 광주 등 일부 지자체는 이미 구체적인 로드맵을 밝히며 새 정부 정책에 화답했다. 타 지자체도 준비에 들어갔다. 무기계약직 전환 등을 추진한 지자체들은 정부 기조에 맞춰 정규직으로 하는 데 더욱 속도를 낼 전망이다.
문제는 재원이다. 지자체들은 인건비 총액을 제한하는 기준인건비제를 손질해야 정규직화가 가능하다고 입을 모은다. 단기 기간제 근로자까지 정규직화하기엔 재정 부담이 크다는 의견도 있다.
세월호 참사 기간제 교사의 순직을 두고도 말들이 많다. "전국의 기간제 교사 4만6000여명을 위한 입법 조치도 이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국민연금공단에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찬성을 강요한 혐의(직권남용) 등으로 구속 기소된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측은 "문 대통령의 세월호 기간제 교사 순직 인정 지시가 정당하다면 자신도 무죄"라고 법정에서 항변했다.
그간 인사혁신처는 기간제 교사 순직 인정에 대해 ‘현행법상 불가’라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노후 석탄 화력발전소 셧다운'을 두고도 과연 미세먼지 저감 효과가 있는지, 전기 요금 인상은 얼마나 클지 등 말이 많다. 또한 오랫동안 화력발전소 건설을 둘러싸고 중앙과 지방 정부 간 갈등은 새 대통령의 말 한마디에 쑥 들어갔다.
국정 역사교과서 전격 폐지로 인한 우려도 나왔다. 국정 교과서를 반대했던 논리가 ‘피교육자들이 선택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인데, 국정·검인정 혼용 선택을 못하게 하고 다른 쪽을 수용하지 않는 방식을 문제로 삼았다. 한 학자는 "국정교과서가 왜 등장했는지, 기존 교과서에 어떤 문제가 있어서 나왔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는 결정"이라고 비판했다.
실제 선동·편향수업 신고센터에 접수된 사례가 2012~2015년 전체 468건에 이른다는 한 민간단체가 조사한 내용도 있다. 일각에선 문 대통령이 몇 호 지시라는 이름으로 중요한 정책을 발표하는 것에 대해서도 못마땅한 눈초리다.
의도가 좋다고 해서 반드시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 시장 논리로 작동되는 경제 분야는 더욱 신중하고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이쯤에서 남북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문선제는 힘으로 국정을 이끈 인물로 역사에 기록된다. 쾌도난마식 해결은 통쾌하다. 아니 통쾌해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이면엔 부작용과 후유증도 있다.
19대 대선 후보였던 홍준표 전 경남지사는 "헌법과 법률 어디에도 대통령은 검찰에 대해 수사지휘권을 행사할 수 없다"며 "중앙지검장 인사를 하고, 최순실 사건을 재수사하라고 한 것은 미국 같으면 사법방해로 탄핵사유에 해당된다"고 날을 세웠다.
"국가적으로 큰 비용이 수반되고 사회적인 논쟁이 됐던 문제들은 반드시 사회적 합의나 정부 내 공적 시스템을 통한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쾌도난마를 외치고 싶을 때엔 마음을 억누르면서 하나하나 풀어가는 지혜도 필요할 듯하다. 그것이 협치와 소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