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삶과 꿈] 동북아 비극 시대에 민중의 지팡이가 되다

2017-02-21 14:27
차일혁, 대한민국 후방을 안정시킨 전투경찰

 6·25전쟁이 일어났을 때 국군과 경찰은 북한의 남침을 저지하기 위해 총력전으로 맞섰다. 군은 전군(全軍) 비상발령과 함께 후방사단들을 총동원하며 대응했고, 치안을 담당하는 내무부는 전국경찰로 하여금 전시체제로 전환케 했다.

 이에 따라 경찰의 총사령탑인 치안국(治安局)은 비상경비총사령부로, 서울특별시와 각도의 경찰국은 비상경비사령부의 전시체제로 전환됐다. 수도 서울을 빼앗기고 전선이 낙동강지역으로 남하함에 따라 경찰은 치안경찰에서 완전히 전투경찰로서 임무를 수행하게 됐다. 정부가 대구(大邱)에 임시수도를 꾸리게 되자, 군과 경찰은 대구방위사령부(大邱防衛司令部)를 설치하여 위기에 처한 대한민국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천상륙작전 이후 경찰은 반공검사로 이름을 날렸던 치안국 정보수사과장 선우종원(鮮于宗源) 경무관의 인솔하에 수도 서울로 들어가 전시하의 치안유지에 노력했고, 국군이 북진할 때는 이북의 수복지역 치안유지를 위해 경찰대대를 편성했으나 중공군의 개입으로 운용되지는 못했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중공군 개입 후 전황이 어렵게 되면서 수도 서울을 적에게 다시 내주게 되자, 치안국은 지리산 일대와 전북지역 등 후방지역에서 준동하는 빨치산들을 토벌하기 위해 여러 개의 전투경찰사령부를 편성하여 운용했다. 지리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사령관, 송병섭 경무관), 태백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사령관, 윤명운 경무관), 운문산지구전투경찰사령부(사령관, 한경록 경무관), 철도기동부대사령부(사령관, 현원덕 총경),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사령관, 이하영 경무관)가 그것이다. 그 중에서 빨치산들이 유별나게 세(勢)를 과시했던 전라북도에서는 제18전투경찰대대를 창설하고, 차일혁 경감을 대대장에 임명했다. 이때부터 차일혁은 빨치산 토벌대장으로서 맹활약을 하게 됐다.

 차일혁(車一赫) 경무관은 6·25전쟁 기간은 물론이고 정전협정 이후에도 빨치산 토벌에 매진했다. 차일혁은 왜 그렇게 빨치산 토벌에 힘썼을까? 이유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빨치산토벌을 통해 자유 민주주의를 이념적 가치로 삼은 대한민국이 전쟁의 위기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북한의 제2전선으로 남한의 곳곳에서 준동하며 주민들을 괴롭히고 있는 빨치산들을 신속히 토벌함으로써 국민들이 평안하게 생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후방을 안정시키겠다는 것이었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고 16세의 어린 나이에 중국대륙으로 건너간 차일혁으로서는 자유가 보장된 대한민국을 공산치하에 놓이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 점에서 차일혁에게 빨치산토벌은 북한 공산주의로부터 대한민국을 유지하게 하는 ‘제2의 독립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자유가 억압당하고 민족정신과 문화가 말살되는 북한의 공산주의체제를 무력에 의해 이식시키려는 북한 공산정권과 그 앞잡이에 해당하는 빨치산에 대해서는 결코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한때는 독립군으로서 한때는 조선의용대 대원으로서 중국대륙을 누비며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동지들과 헤어져 남한을 택했던 차일혁에게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공산화하려는 김일성(金日成) 집단과 이를 추종하는 빨치산 세력에 대해서는 강력한 응징만이 필요했다. 북한은 6·25전쟁을 모의하면서 전선에서는 소련제 현대식 전차를 앞세운 북한인민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국군의 주력을 한강이북에서 섬멸하고, 후방에서는 남로당 20만 명의 ‘인민봉기’에 의해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킨다는 계획 하에 전쟁을 도발했다. 국제공산주의의 두령(頭領) 격인 소련 수상 스탈린(Iosif V. Stalin)이 김일성의 남침을 승인해 준 것도 알고 보면 후방에서의 폭동을 의미하는 ‘남로당 20만 봉기 발언’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면 전쟁은 1개월 만에 북한의 승리로 충분히 끝낼 수 있다고 여겼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김일성은 1950년 6월 25일 남침을 하자마자 평양방송을 통해 “남한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에게 후방에서 빨치산 투쟁을 활발히 전개할 것”을 지령(指令)했다. 남한 내 공산주의자들인 남로당(南勞黨, ‘남조선노동당’의 줄임말) 당원들은 이때부터 곳곳에서 들고 일어났다. 북한군은 이들을 앞세워 남한 점령지역에서 ‘인민위원회’를 만들어 군경가족 색출, 인민재판, 우익인사 처형 등을 통해 ‘공산화 작업’에 돌입했다.
빨치산 세력이 본격적으로 무장하며 군대조직화 된 것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에 투입된 북한군 패잔병이 지리산 일대의 산악지형으로 숨어들고, 지방의 골수 공산분자들이 무장한 후 인근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바탕으로 ‘인민해방구(人民解放區)’를 만들면서부터이다.

 이현상(李鉉相)을 총책으로 한 남부군은 지리산 일대와 전라남북도의 험준한 산악지형을 기반으로 인근지역을 대한민국의 치안으로부터 철저히 배제시켰다. 이른바 대한민국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인민해방구’였다. 이들 지역은 대한민국 속의 ‘인민공화국 영토’로 변했다. 후방지역에서 빨치산들의 패악(悖惡)을 보다 못한 대한민국 정부는 그 심각성을 인식하고 군과 경찰은 물론이고 미8군까지 동원하게 됐다. 빨치산토벌을 위한 총력전이었다. 후방의 안정 없이는 대한민국이 전쟁을 원활히 수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두고두고 암적인 존재로 남을 것이 분명했다. 뿌리째 없애는 발본색원이 필요했다.

 차일혁의 제18전투경찰대대가 토벌할 전라북도 지역은 빨치산의 근거지로서 뿐만 아니라 전쟁수행에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이는 임진왜란 중인 1593년 7월 16일,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정5품)인 현덕승(玄德升)에게 보낸 편지에서 “호남은 국가의 보장이니 만약 호남이 없다면 곧 국가도 없다(湖南國家之保障 若無湖南是無國家·호남국가지보장 약무호남시무국가)”고 말한 것처럼 전국에서 가장 극성을 부리고 있는 전라북도 내의 빨치산들을 뿌리 뽑지 않고는 호남의 안정도 기대할 수 없었다. 1950년 12월 당시 전국의 빨치산들이 6만 명이었는데, 그 중 절반이 넘는 3만2천명이 전라북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사진: 차일혁기념사업회 제공]

차일혁의 전투경찰 부대는 전라북도 내의 이들 빨치산 세력을 하나씩 소탕해 나가야 했다. 그래야만 전라북도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전라북도의 안정은 곧 호남지방의 안정을 뜻했다. 전라북도의 빨치산을 근절시켜야 지리산에 본거지를 둔 남한 내 빨치산총사령부 격인 남부군(南部軍)의 조직을 와해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될 경우 남한의 후방지역에 대한 안정도 비로소 보장받을 수 있게 됐다. 조선(朝鮮)이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여러 요인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전라도를 확보했기에 가능했다. 조선은 전라도 지역으로부터 병력과 물자를 꾸준히 공급 받고 있었다. 이로 인해 조선은 전 국토를 유린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왜군(倭軍)과의 7년이라는 끈질긴 항전을 벌일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결국 왜군을 물리칠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됐다. 이순신 장군의 호남의 중요성에 대한 발언도 결국 전쟁에서 후방의 안정과 역할에 대한 강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전라북도가 포함된 호남지역은 6·25전쟁 때도 식량보급기지로서 중요한 지역이었다. 유엔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9월 15일에 단행했던 것도 호남지역의 식량과 무관하지 않다. 북한은 인천상륙작전 이전 곡창지대인 호남지역에서 식량을 약탈해 가기 위해 벼의 낟알까지 세어가며 수확량을 계산해 두고 있었다. 이는 북한군의 군량미(軍糧米)로 쓰기 위함이었다. 맥아더는 북한군이 호남의 곡창지대의 쌀을 추수해 가기 전에 이곳을 확보할 목적으로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성공시켰던 것이다. 만약 10월에 인천상륙작전을 실시했다면 북한의 공산정권은 호남지역의 쌀을 수확해 갔을 것이다. 인천상륙작전은 서울을 탈환하고 낙동강 전선에서 올라오는 미8군과의 연결작전(link-up operation)이라는 전략적 차원의 목적도 있었지만, 호남지역의 곡창지대를 확보한다는 군수차원의 목표도 내포되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호남지역의 쌀을 수확하지 못한 북한은 이후 식량보급에 곤란을 겪게 됐다. 그 결과 중공군이 북한을 돕기 위해 6·25전쟁에 개입했을 때 북한으로부터 식량을 지원받지 못하고, 중국본토의 곳곳에서 마련해 준 미싯가루와 육포(肉脯) 등과 같은 건량(乾糧)으로 끼니를 때워야 했다. 중공군이 소화불량과 야맹증(夜盲症)으로 고생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차일혁이 빨치산 토벌작전을 시작한 전라북도는 빨치산들이 활동하기에 적합한 지역이었다. 게릴라 활동을 위해서는 반드시 식량과 물 그리고 그들을 보호해 줄 드넓은 산악지형이 꼭 필요했다. 여기에 덧붙여 외부로부터의 지속적인 무기 공급도 따라줘야 했다. 그런 점에서 해안을 끼고 있을 뿐 아니라 인근 산악지형을 통해 지리산으로 연결되는 전북지역은 남한에서 빨치산들이 게릴라 활동을 하기엔 최적화된 지역이었다. 다만 북한이 이를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을 뿐이다. 전북지역은 험준한 산악지형과 평야가 공존하는 곳이다.

 그 중에서도 완주, 정읍, 고창, 순창, 장수, 임실, 무주지역은 빨치산들이 활동하기에 좋은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차일혁이 지휘한 제18전투경찰부대와 이후 연대급으로 창설된 철주(鐵舟)부대는 구이작전을 통해 완주일대의 치안을 회복시킨데 이어 칠보발전소를 탈환함으로써 1급 국가시설을 안전하게 보호했다. 뒤이어 고창과 정읍지역, 그리고 순창과 장수 일대의 빨치산들을 차례로 소탕함으로써 빨치산들이 극성을 부리던 전라북도 지역을 가장 빨리 안정된 지역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는 차일혁과 그의 지휘를 받는 전투경찰부대의 위국헌신(爲國獻身)의 역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차일혁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전라북도의 빨치산을 완전히 토벌한 다음, 차일혁이 향한 곳은 빨치산의 본거지이자 빨치산 총수 이현상이 있는 지리산이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