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신식 화폐를 만든 인천 전환국
2017-01-03 09:20
아주경제 박흥서 기자 =조선 정부는 당오전(當五錢)의 폐단이나 중량이 무거웠던 상평통보를 대신한 신식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1888년 2월 선혜청 별청 자리에 경성전환국을 두고 신식화폐를 발행했다.
그러나 거의 유통되지 못하였고 시험적 단계에 그치고 말았다.
1891년 11월 전환국으로 하여금 1888년에 주조하다 중지한 바 있는 은화·동화 등 근대화폐를 다시 주조하게 하고, 교환국을 따로 설치하여 새로 주조될 근대화폐와 상평통보·당오전과 구애됨이 없이 통용케 하는 절목을 작성하여 시행하게 했다.
또, 일본의 자본 및 기술적 협조를 얻어 전환국을 서울에서 인천으로 옮기고 조폐기계 시설을 확대 증설했다.
건물은 3동 요철형으로 중앙에 사무실 겸 화폐 조사실·검인실이 있었고, 동쪽에 기계실과 기관실이, 서쪽에는 조각과 창고 및 감찰실이 있었다.
압인기 9대를 설치하였는데, 2대는 경성전환국에서 사용하던 것이었고, 6대는 1892년 오사카조폐국에서 도입했다.
1892년부터 1900년 용산으로 옮겨가기까지 인천전환국에서는 신식화폐조례에 따라 5냥 은화, 1냥 은화, 2전5푼 백동화, 5푼 적동화, 1푼 황동화를 주조했다.
1888년 경성전환국에서 주조했던 것과 비슷했으나 앞면 중앙의 태극장이 왕실의 휘장인 이화장(梨花章)으로 바뀌었고, 양쪽 모두 오얏나무 가지였던 것을 우측은 오얏나무 가지로, 좌측은 무궁화 가지로 바뀌었다.
뒷면 중앙에는 용을 도안했고 둘레에 연기(年紀)와 국호를 새겨 넣었는데, 인천 전환국에서 최초로 제조된 화폐에는 대조선개국오백일년(大朝鮮開國五百一年)이라는 국호와 연기가 표기됐다.
그러나 청나라의 간섭으로 이후 제조된 화폐에는‘대(大)’자가 제거되기도 하였고, 청일전쟁으로 청국이 패배한 후에는 다시 사용되기도 하였다.
조선정부는 격증하는 화폐수요량에 대처하기 위해 대일차관으로 인천전환국의 확장을 시도했다.
그러나 1898년(광무 2) 8월 건축 및 기계증설 등 인천전환국의 확장공사가 한창일 무렵 용산으로 이전이 결정됐다.
당시 인천과 노량진 간의 경인철도 완공을 눈앞에 둔 시점이었고, 러시아 세력이 조선 조정 내에 세력을 확대하면서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시기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