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의 차 한 잔] 스스로를 빛나게 하는 '빛수행'을 아시나요?

2016-10-12 16:20
칼럼니스트(문학박사)

강원도 평창 하늘목장에 펼쳐진 풀밭 [사진=하도겸 박사 제공]


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외롭지 않다는 사람은 보통 사람보다 더 외롭다는 뜻일 수 있다. 정색까지 하면서 정말 외롭지 않다는 사람은 스스로 자각을 못할 정도로 자기최면에 사로잡힌 사람이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인생은 고통의 연속이고 그 고통의 절반은 외로움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린 혼자 살 수 없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외로움은 수십미터 속의 동굴 속의 깊은 어둠과 같다. 깊은 동굴로 들어가다 보면 천천히 절대적인 암흑 같은 무명이 나온다. 가지고 갔던 전등 등의 불을 끄면 정말 절대 암흑과 같은 고독을 체감하게 된다. 한참을 지나도 윤곽조차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전혀 빛이 없기 때문에 아니 반사되는 빛조차도 없기 때문인가? 그런 무명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아니면 모르면서 아는척하는지, 알면서 모른 척하는지는 사람마다 다를 다를 뿐이다.

무명속에 살고 있는 우리는 마치 우물 속 개구리와 같다고도 할 수 있다. 우물 밖을 한 번도 나가지 못한 개구리는 10초 조차도 직선거리로 헤엄칠 수 없는 좁은 우물 속을 넓은 곳, 더 나아가 우주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런 우물 속 개구리처럼 우리들은 겸손하지 못하고 신중하지도 못한 채 뭐든지 ‘잘 안다는 듯’ 자랑질을 하고 다닌다. 내가 지금 어디 서 있는지도 모르면서 살고 있다. 그래서 조고각하가 수행자의 기본인 듯하다. 우리도 우물 속 개구리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라고 할 것도 없이 어쩌면 우리는 현실이라는 꿈 같은 허울 속에 갇혀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죽어야만 깨어나는 그런 깊은 꿈속에서 살고 있을 수 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꿈이고, 꿈에 가서 잠시 현실로 돌아가고 다시 깨면서 그 조금만을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게 사실이라면 우린 꿈 같은 가상현실 속에 살면서 그걸 모르고 있는게 된다. 어쩌면 안드로이드나 사이보그, 아바타처럼 가상의 시공간과 생활 프로토콜을 입력 당한 채 그대로 실행만 하는 프로그램 속 아이템들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우리가 신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프로그래머들에 의해 조작된 3차원에서 4차원 이상의 세상과 평행선을 그으면서 살아가고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프로그램에 버그가 나듯이 어떤 오류로 인해서 가끔 두 세계가 접촉을 시도하기도 하나 보다. 가뭄에 콩 나듯이 플린지와 같은 평행세상이 교차하는 가운데 우리는 두 세계에 모두 실존하는 '신과 같은 인간'이고 싶어하는 듯하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의 한 펜션 창문에서 바라본 가을 단풍 [사진=하도겸 박사 제공]


우리는 깊은 명상 속에서 가끔 에너지 체화된 ‘빛’의 몸을 보기도 한다. 명상에서 깨어나 일상생활에서도 사람들 몸의 색을 스펙트럼처럼 시각화해서 보기도 하나보다. 단전도 보이고 차크라가 열린 것도 보이며 임독맥의 흐름도 보인다. 또한 사람에 따라 온도가 변화하는데도 불구하고 폭염 속에서 전혀 다른 빛깔을 띤 사람들을 보기도 한다. 검은 사람, 붉은 사람, 노란 사람, 푸른 사람, 투명한 사람, 빛나는 사람 등등. 부처님의 몸에서 자색 또는 금빛 광채가 난 것처럼 우리는 영성의 시대를 맞이하면서부터 빛의 몸을 간절히 원하게 된다.

빛의 몸이란 집착을 끊을 수 있는 비로자나불이라는 부처의 ‘법신’과 같은 몸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들은 정법을 어렵게 깨닫기 위해 노력하기 보다 이 빛의 몸을 애착하고 환상을 통해서 보려는 '돈의 노예'가 되어가기도 한다. 그렇다. 이런 습성을 이용해서 수많은 동서양의 사이비 종교 같은 돈을 밝히는 단체들이 바로 여기에 개입한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 돈을 바쳐야 하는 영성의 시대는 거짓과 허위임에도 불구하고 암흑 속에서 벗어나고 싶은 ‘삶의 수행자’들을 빛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게 한다. 물론 수없이 윤회전생을 하면서 겪는 '암흑'이라는 고통 속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어쩌면 유일한 방법이 내 몸에 ‘빛’을 소유하는 것일 수 있다. 까닭에 빚의 몸에 대한 관념적인 환상에 빠지지 않는 것이 더 힘들어지나 보다.

아쉽게도 빛에 대한 환상을 보여주는 댓가로 우리 주변에 엄청난 돈을 요구하는 어떤 사이비 단체의 교주도 신에 다다르지 못했다. 그들이 과거 언젠가 잠시 비록 체험했다고 해도 지금 우리 앞에 나타난 그들은 신이나 우주인이 아닌 ‘인간’이며, 그들에게서는 신의 빛을 볼 수 없다. 오직 돈만을 요구하는 그들의 뒤에 쌓인 황금의 색깔만을 볼 수 있을 뿐이다. 심지어 그들이 가르치는 수행법이라는 것은 바른 수행자라면 누구나 성취해서 알 수 있는 것을 변형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수행을 통해서 정말 작은 불빛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정말 큰 행운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 빛은 영원할 수 없다.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고 소멸되지 않은 것은 없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빛의 명상에 의지해서 작은 희망을 키울 수 있는 것도 좋지만, 그게 전부도 아니기 때문에 단지 돈으로 정말 미세한 빛을 사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 빛이 잠시 내게 있다고 해서 내가 신이 되거나 궁극적으로 인간으로서 외롭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평생 수행해서 주변이라도 밝힐 수 있는 최소한의 빛을 가지는 것이 인생을 사는 수행자의 하나의 목적이라면 맞다. 하지만 이러한 과업은 이 생이 안되면 다음 생도 가능하다. 그렇게 오늘도 한걸음씩 나아가면 될 따름이다.

돈과 몸과 시간을 바쳐가면서까지 자력이 아니라 타력으로, 즉 내 노력이 아닌 남의 힘으로 쉽게 얻는 것은 쉽게 사라질 따름이다. 돈으로 산 빛이 사라졌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서 우리가 속았고, 그 이후가 더 외롭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는 점을 간접 경험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고급케이스로 포장된 중국의 우이암차 [사진=하도겸 박사 제공]


혹시 주변에 수백만원 아니 수천만원 이상을 요구하는 수행단체가 있다면 사이비일 가능성이 적지 않다. 그 단체에 들어가도 원하는 것은 얻을 수 없으며, 오히려 더욱 괴롭기만 할 따름이다. 아니 당장은 아니지만 시간이 갈수록 더 외로워지며 한번 빠지면 수렁과 같아서 나오기는 더욱 힘들 것이다.

수행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 혹시 이 소의 뿔이 두 개라도 스승과 제자가 일심동체로 함께 가는 것이다. 도반끼리 서로 도와가며 같이 가는 것이다. 그 여행 길에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엄청난 돈을 일방적으로 요구한다면, 그건 이미 바른 길에서 벗어나 사이비의 길을 가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이비는 이처럼 쉽게 판별된다. 아무리 물질을 넘어선, 아니 비물질적으로 대단한 '도'를 준다고 해도 이미 그건 정법을 벗어난 사이비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도는 스스로 수행을 하면서 닦는 것이지 돈으로 사고 파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나’만을 위해 살지 않고 ‘우리’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사이비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이와 같이 살아간다면, 시나브로 마음에는 ‘빛’이 자리잡게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