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화보] 中 문화콘텐츠의 새 장을 연 메이솨이위안
2016-07-07 15:12
인민화보 왕자인(王佳音) 기자 =어느 날 오후 메이솨이위안(梅帥元)의 회사에서 그를 만났다. 비서는 그가 그리스에서 막 돌아와 시차가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라고 말했다. 그래서 기자는 그가 매우 피곤한 모습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정작 그를 만나보니 기자의 생각은 틀린 것이었다. 실경(實景)공연(실제 풍경을 무대로 한 공연)과 회사의 앞날에 대한 계획을 말하는 그는 생기가 넘쳤고 어조에서 안정감과 자신감이 묻어났다.
10년 전 <뉴욕타임스>가 ‘중국식 산수 환상’이라고 극찬한 <인상·유삼저(印象·劉三姐)> 는 관광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실경공연이 늘어났다. ‘유씨 집안의 셋째 딸’이라는 뜻으로 남녀 사랑의 애타는 심정을 그린 이 실경 공연은 5년 동안 7000만 위안(약 125억7000만원)을 투입해 8억 위안의 수입을 창출했다. <인상·유삼저>의 성공을 사람들은 함께 지켜봤다. ‘세계 최대의 수상 오페라’로 불리는 환상적인 <인상·유삼저>를 만든 사람이 바로 메이솨이위안이다.
산골 광산 출신의 문화인사
며칠 동안 그는 한쪽 구석에서 다른 사람의 연기를 몰래 지켜봤다. 그러나 그 누구도 자기보다 잘한다고 생각되지 않았다. 이에 그의 아버지는 즉시 메이솨이위안을 데리고 문화선전공작단을 찾아갔다. 문화선전공작단 책임자는 아버지의 위풍당당한 용모와 건장한 풍채, 기세를 보고 파격적으로 메이솨이위안을 받아들였다.
3년 동안 중국 전통극 공부를 마친 그는 광시장극단(廣西壯劇團)으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그는 숙소에서 몰래 빠져나와 숙소 옆에 있는 자료실에서 책을 보곤 했다. 극단이 시골에서 공연할 때 그는 지방색이 뚜렷한 소수민족의 풍속을 접했다. 버스가 구불구불한 산길을 올라갈 때면 그는 늘 말없이 의자에 기대 앉아 창밖의 웅장한 산골짜기를 바라보며 꿈을 꿨다. 머릿속에 기이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그는 그것들을 글로 쓰기로 결심했다.
메이솨이위안은 광시에서 최초로 사업에 뛰어든 문인이다. 그는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극단 배우에서 극작가로 전업했다. 여유 시간이 늘어나자 그는 광고회사를 차렸다. 광고회사가 쉽게 돈을 벌 수 있었던 시대에 그는 ‘호시절’에 편승해 몇년 만에 별장과 자가용을 갖게 됐다.
1997년 광시장극단 단장으로 임명된 그는 제도 개혁과 혁신을 시작했다. 인원 감축 및 인재 도입, 소극단 설립, 상업적 공연 기획, 지방 공연, 심지어 부동산 사업까지 하여 극단의 수익을 창출하는 데 힘을 썼다. 이런 노력은 칭찬도 받았지만 비난도 받았다. 여기서 그는 제일 중요한 한 가지를 깨달았다. 개인의 노력으로 오래된 극단의 상황을 개선할 수는 있지만 이런 ‘점(點)’적인 변화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었다. 점적인 변화는 발전의 흐름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며 근본적인 문제도 해결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그에게는 괴로움의 근원이었다.
메이솨이위안은 창작할 때 강가에서 일정 기간 머무는 것을 좋아한다. 점점이 흩어진 고깃배의 등불, 모락모락 피어나는 밥 짓는 연기, 만개한 계수나무 꽃, 면면히 이어진 계단식 논밭, 강변에서 깔깔거리며 옷을 빠는 촌부, 초원에서 한가하게 풀을 뜯는 소들은 강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그는 어민의 가마우지가 십여 근짜리 대어를 잡는 것도 봤다. 어느날 그는 눈 앞에 보이는 실제 풍경을 무대로 삼아 리(漓)강에서 유삼저 이야기를 소재로 한 대형 가무공연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다. 중국 최고의 제작팀에게 제작을 맡기고 유명한 장이머우(張藝謀) 감독에게 연출을 맡기면 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다.
이 참신한 생각을 들은 사람들은 다 좋다고 했지만 시행 가능성에 대해서는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메이솨이위안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설을 쓰던 실력을 발휘해 2시간 만에 프로젝트 시행가능성 보고서를 작성하여 자치구 관련 부서에 제출했다.
5년 동안의 악전고투
1999년 메이솨이위안은 일체의 공직에서 사퇴하고 ‘자유인’이 됐다. 그리고 <인상·유삼저> 프로젝트에 몰두했다. 그는 광시성 문화청에서 지원받은 20만 위안을 가지고 난닝(南寧)에서 구이린(桂林) 양숴(陽朔)까지 홀로 와서 상업화 운영을 시험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찟어진 옷을 고치느니 새옷을 만드는 게 나았다
공연의 지명도를 높이기 위해 그는 장이머우 감독을 찾아갔다. ‘이곳의 산, 이곳의 물, 이곳의 사람’이라는 참신한 공연 철학에 장 감독의 마음이 움직였다. 장 감독의 동의를 얻은 메이솨이위안은 길고도 고달픈 ‘투자자 찾기’ 여정에 올랐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얼마나 많은 투자자를 만나고 얼마나 많은 계약을 맺었는지 모를 정도로 고생을 했다. 어떤 투자자는 도중에 투자금을 회수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실경공연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자금, 디자인, 기술 문제 등이 메이솨이위안과 그의 팀을 괴롭혔다. 게다가 자금 지원마져 끊겼다. 그러나 1999년부터 2003년 말까지 장장 5년이 걸린 끝에 공연이 완성됐다. 어떤 의미에서 이 공연은 기획자이자 총제작자인 메이솨이위안이 구이린에서 축적한 삶의 경험을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03년 10월 <인상·유삼저>가 구이린 양숴에서 시험 공연을 시작했다. 리강을 무대로, 수퉁(書童)산 12봉을 막으로, 점점이 흩어진 고깃배의 불빛이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했다. 조명 아래의 구이린 산수는 한낮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아름다움을 풍겼다. 물고기를 잡는 가마우지, 고깃배의 등불, 소를 돌보는 목동, 민간 가곡 등 생생하게 펼쳐지는 삶의 모습이 실제 풍경을 무대로 화폭처럼 이어졌다. 배우 대부분은 리강 주변의 농민과 어민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연기했고 때문에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천년 전 ‘노래의 신’ 유삼저의 노래가 산과 물 사이에 울려퍼졌다. 보일듯 말듯한 산봉우리, 물에 비친 그림자, 흩뿌리는 안개비, 대나무숲의 맑은 울림, 쏟아지는 달빛이 모두 장면을 만들었다.
첫 공연을 떠올리면서 메이솨이위안은 “사실 당시에는 거의 쓰러질 것 같은 악전고투의 하루 하루였다”고 말했다. 공연 시작 전 그는 여행 가이드들을 초청했다. 그러나 거의 오지 않았다.
가이드들은 스타도 없고 특별한 퍼포먼스도 없는 이런 공연을 관광객들이 좋아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메이솨이위안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이 공연은 자연과 하나가 된 전대미문의 공연 형식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가장 아름다웠던 시간을 환원했다. 과거 이곳 사람들은 고깃배에 등불을 달고 고기를 잡았고 등불로 부유생물을 유인해 물고기가 와서 먹도록 했다. 또 가마우지로 물고기를 잡았다. 지금은 볼 수 없는 풍경들이다.”
이듬해 5월 관객 수가 갑자기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구이린의 가이드들은 사전에 표를 사지 않고 현장에 왔다가 정말 표가 없자 메이솨이위안에게 전화를 걸어 인맥을 이용해 표를 사려고 하기도 했다.
이 공연은 주변의 호텔업과 지역경제 발전을 이끌었다. 가장 큰 이익을 본 것은 현지 주민이었다. 과거 현지 사람들은 물고기 잡이와 농사 등으로 적은 수익을 얻었다. 그러나 공연 덕분에 농민들은 ‘연기자’로 변신해 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연을 하게 됐다. 한달 수입이 몇백 위안에서 수천 위안으로 늘었고 삶의 질도 뚜렷하게 향상됐다.
현재 <인상·유삼저>는 이 지역의 살아있는 명함이 됐다. 공연을 보려는 관광객은 반드시 양숴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한다. 그들이 먹고 자고 관광하는 것이 산업사슬의 발전을 이끌었다. 길이 하나밖에 없던 이 작은 마을에 지금은 3, 4성급 호텔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심지어 이 공연으로 구이린의 국내총생산(GDP)이 두자릿 수나 증가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산수 실경공연의 해외진출
<인상·유삼저>가 실경공연의 서막을 열었다면 메이솨이위안과 그의 산수대전(山水大典) 시리즈는 풍경을 통해 관객에게 색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려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중국적 색채가 강한 이러한 공연 형식의 해외 진출을 모색 중이다.
<인상·유삼저> 이후 메이솨이위안은 중원 불교 성지에 관한 <선종소림·음악대전(禅宗少林·音樂大典)>, 중국의 홍색혁명 발원사에 관한 <인상·정강산(印象·井岡山)> 등 여러 작품을 제작했다. 이 가운데 <중화태산·봉선대전(中華泰山·封禅大典)>은 사라진 제왕의식을 부활시켰다.
최근 메이솨이위안은 중국 실경공연의 해외진출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첫 번째 나라는 베트남이다. 과거 메이솨이위안은 여러 차레 베트남을 방문했지만 시기상조라고 판단해 미뤄두었다. 어느 날 베트남 호이안의 한 은행가가 중국에 왔다가 구이린의 실경공연을 보고 이런 공연형식은 자연 환경이나 문화적 분위기로 볼때 베트남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양측은 뜻이 통해 협력을 진행하게 됐다.
메이솨이위안은 “10년의 발전을 거쳐 이제 해외 관광객도 실경공연을 받아들이게 됐다”면서 <인상·유삼저>의 경우 관객의 절반이 유럽인이라고 말했다. <천문호선·신류해감초(天門狐仙·新劉海砍樵)>의 경우 장자제(張家界)를 찾는 한국인 관광객의 필수코스가 됐다. 한해 60여 만명의 관객 가운데 25만명이 한국인이다.
베트남 외에 산수 대전은 그리스, 이탈리아 등 유럽 국가와의 협력에도 주력하고 있다. 그는 “유럽 국가의 관광 명소는 유동 관광객이 매우 많지만 그들에겐 아직 관광 공연이라는 개념이 없다. 있어도 소규모 공연이거나 오페라 정도로 상시 공연하는 것은 없다. 마르코 폴로는 공연으로 만들기 좋은 인물로 그에게는 스토리가 많아 양국 국민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다”고 말했다.
메이솨이위안은 산수 공연은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중국 문화의 본질을 반영한 것이고 이런 공연의 성공은 중국의 천인합일(天人合一) 철학, 미적 취향과 큰 관계가 있다고 강조했다. 메이솨이위안은 이렇게 설명했다. “산수 실경공연의 영혼은 무엇인가? 그 산, 그 물, 그 사람으로 진정한 의미의 원시적인 상태를 보여주는 공연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이곳의 산, 이곳의 물, 이곳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공연 전체를 구성하지만 이것들은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현지의 문화적 특징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바로 실경공연의 핵심 경쟁력이다. 마치 나무처럼 오랫동안 한 곳에서 자라 자연스럽게 과실을 맺는 것이다. 이런 공연은 유사한 공연을 만들어낼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관광객이 반드시 관람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다.”
지난 10년 동안 실경공연 형식에 큰 변화가 생겼다. <인상·유삼저>의 단순한 시각적 공연에서 <선종소림·음악대전>의 음악으로 관객을 감동시키는 것까지 발전했다. 여기에 해외 첨단기술팀의 도움으로 다양한 과학기술까지 동원함으로써 공연의 흡인력을 높였다.
이에 대해 메이솨이위안은 실경공연은 표현 형식과 방법을 혁신할 수 있지만 내용은 반드시 중국의 것이어야 하고 과학기술을 이용하되 튀지 않고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천문호선·신류해감초>는 데이비드 카퍼필드 팀을 초청해 LED 스크린을 풍경 속에 감춰놓아 관객은 장치의 흔적은 보지 못하고 환상적인 마술 효과만 볼 수 있도록 했다.
메이솨이위안은 좋은 공연은 풍경과 하나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풍경은 원래 있던 곳에서 이곳으로 와서 우리의 포장을 약간 거친 후 다시 있던 곳으로 가볍게 돌려보내진다. 공연에서 사람이 지나치게 강조돼서는 안된다. 사람이 산수와 자연보다 커서는 안 된다. 사람이 절반을 하고 하늘이 절반을 한다. 전과정이 마치 대자연이라는 어머니가 자신의 아이를 조용히 바라보는 것처럼 평화롭고 진실하게 이뤄져야 한다.”
* 본 기사는 중국 국무원 산하 중국외문국 인민화보사가 제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