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人100言]임대홍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고 있다”

2016-04-06 15:39
한국경제의 기적을 이끌어낸 기업인들의 ‘이 한마디’ (62)

인곡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자[.]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국가와 민족을 위한 기업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것을 깊게 사랑해 밝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한다.”

인곡(仁谷) 임대홍 대상그룹 창업자는 1945년 광복 이후 모피가공업에 뛰어들며 기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6·25 전쟁 이후 무역업으로 사업을 확장한 인곡은 사업 차 일본을 자주 드나들었다. 모든 것이 부족했던 당시 한국의 상황을 틈타 대거 몰려드는 일본산 제품들을 보면서 ‘광복이 된지 10년도 안됐는데, 이러다간 또 다시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갈 것’이라며 안타까워했다.

“한국인을 위해 만든 제품을 한국인에게 제공하자”고 결심한 인곡의 눈에 들어온 것이 조미료다. 음식을 만드는 주재료인 식품에 첨가해서 음식의 맛을 돋우며 조절하는 물질인 조미료는 국민의 식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제품이다. 인곡은 국내 조미료 시장을 점령한 일제 조미료 ‘아지노모토’를 몰아내고 한국의 조미료로 세계로 나아가야겠다고 결심했다.

1955년 봄 일본으로 건너간 인곡은 오사카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조미료의 성분인 ‘글루타민산’의 제조 방법을 배웠다. 1년의 시간을 보낸 뒤 귀국한 그는 1956년 1월 31일, 부산 동래구 대신동에 ‘동아화성공업(주)’를 설립하고 국내 최초의 조미료 공장을 차렸다. 이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이 국산 발효조미료 1호인 '미원’이다.

미원은 호암(湖巖)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에게 평생의 한을 갖게 만든 제품이다. 설탕공장으로 성공한 호암은 조미료 시장에 진출해 ‘미풍’이란 이름으로 출시했다. 양사간 경쟁은 나라가 흔들릴 정도로 치열했는데 결국 미원이 승리했다. 호암은 말년에 자신의 의지대로 안 된 것 3가지 중 하나가 ‘미원을 누르지 못한 것’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인곡은 1960년대 중반 국내 최초로 발효법에 의한 글루타민산 생산기술 개발에 성공하며 사실상 국내 바이오산업의 장을 열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후에도 L-글루타민산 나트륨, L-페닐알라닌, L-글루타민 등 20여 종의 아미노산과 핵산 등의 제조기술을 개발하는 등 수 많은 1등 상품을 배출하며 현재까지 조미료시장 업계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은둔형 경영자’로 불리는 인곡은 ‘실험광’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만큼 말년까지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 낡은 양옥에 차려놓은 실험실에서 실험도구와 씨름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오늘날 대상그룹이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데는 창업자의 유별난(?) 탐구정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한 때 국내 최고 부자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힐 만큼 돈을 모았지만, 인곡은 지독할 정도로 검소한 생활을 실천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1년에 1~2차례 일본에 출장갈 때마다 그가 묵는 곳은 도쿄 변두리 지역에 있는 7평짜리 아파트였다. 이 아파트는 일본에 출장 가는 사원들의 공용숙소로 이용토록 하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인곡은 꼭 이 곳에 머물며 와이셔츠, 내의, 양말 등을 직접 세탁해 입는 것은 물론 식사도 한 끼 이상은 꼭 라면을 끓여먹었다. 회사에 출근해서도 특별한 외부의 공식행사가 없는 한 반드시 도시락을 갖고 와 사무실에서 점심식사를 했으니, 본사에 근무하는 직원들도 그를 몰라볼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의 태도를 ‘논어’에 있는 공자가 증자에게 전한 “나의 도는 하나로 꿰뚫고 있다(吾道一以貫之)”는 말을 인용해 들려줬다고 한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고, 상대를 이해하고 헤아리고자 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