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3국 정립(鼎立) 수평적 평화공존 위해 목을 던졌던 선견적 동양평화론
2016-03-26 06:00
안중근 의사 서거 106주년 - 나라를 걱정한 우국지사의 통한(痛恨)
박종렬(朴鍾烈) 가천대학교(嘉泉大學校) 신문방송학과교수(정치학박사)=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은 안중근 의사(義士)는 106년전인 오늘 3월 26일 오전 10시,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중국 땅 뤼순(旅順) 감옥에는 31세에 순국(殉國)했다.
"내가 한국독립을 회복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기 위하여 3년 동안 해외에서 풍찬노숙 하다가 마침내 그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이곳에서 죽노니, 우리들 2천만 형제자매는 각각 스스로 분발하여 학문에 힘쓰고 실업을 진흥하며, 나의 끼친 뜻을 이어 자유 독립을 회복하면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노라."
신군국주의화로 치닫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수상의 폭주와 중국의 중화주의, 3차에 걸친 북한 핵실험 등 한반도를 둘러싼 3국의 길항(拮抗)은 여전하다. 헌법학자 다수가 위헌이라는 안보법제 파동과 중국의 동북공정 등 자국중심의 역사인식 강화라는 측면이 역사왜곡을 초래, 3국 사이에 역사적 인식에 편차가 크다는 사실을 웅변으로 증명하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은 국력이 대등할 때는 평화를 유지했으나 한쪽이 기울 때는 패권경쟁을 통해 세력재편을 해온 역사적 경험은‘역사는 반복된다’는 경귀(驚句)를 떠오르게 한다.
6,25 휴전협정에는 참여조차 못했던 민족적 비극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전쟁이 날 때마다 한반도는 전쟁터가 되고 참화속에서 미증유의 국난(國難)을 당해야 했던 약소국 비애를 통절하게 겪어야 했다.
근자에 중국이 G2국가로 급성장하면서 중-일은 아시아 맹주를 놓고 다시 센카쿠 열도에서 무력대치하고, 한-중은 사드배치문제, 한-일은 독도 영토분쟁과 위안부 문제 등으로 갈등 하는 등 한중일 3국은 긴장국면이 계속되고 있다.
2011년 동일본지진 이후 총체적 국가위기를 맞은 일본은 우경화를 넘어 전쟁 가능한 국가로 지가네(地金)를 드러내면서 과거 군국주의 시절의 팽창주의 야욕을 상기시켜 전쟁전야(戰爭前夜)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처럼 국가이익이 충돌하고 있는 21세기 동아시아에서 지역통합이나 평화는 논의돼 왔으나 중-일 패권경쟁으로 구체적 실천은 안 되고 있다. 2008년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수상 제안으로 동아시아공동체 설립을 목적으로 탄생한 한국 중국 일본의 3국협력위원회가 설치되었음에도 유명무실한 상태로 잠자고 있다.
격랑이 몰아치는 작금의 동북아 정세를 보면서 1세기전 일본 주도의 한-중-일 관계에서 수직적 국제질서를 요구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대동아공영권에 맞서 3국이 정립(鼎立)된 수평적 평화공존을 위해 목숨을 던졌던 안 의사의 선견적 동양평화론이 새삼 옷깃을 여미게 한다.
평화주의자였던 안 의사는 "나는 대한의 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의 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는가?"며 세계열강의 서세동점(西勢東漸)에 맞서 한-중-일 3국이 서로를 돕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 생각, 동양평화론을 설파한것이다.
일본이 뤼순을 청에 반환하고 한중일 3국이 3국 대표로 동양평화회의를 조직, 공동 관리하는 중립지대를 만들며, 그곳에 3국 평화회의를 설립하고 3국에서 대표를 파견하며 동양 3국의 의견을 조율하며, 3국 청년들로 구성된 군단을 창설하고 한중일 공동은행 설립과 공용화폐 등을 만들자는 주장이다.
사형 선고를 받은 뒤 항소를 포기하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집필했던‘동양평화론’은 결국 서문만 완성하고 사형이 집행되었기 때문에 완성되지 못했다.
안 의사 의거 당시 중국 인물들도 안 의사 의거를 높이 평가했다.
중국의 국부 손중산(孫中山)은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제사를 써서 찬양했다.
공은 삼한을 덮고 이름은 만국에 떨치나니
백세의 삶은 아니나 죽어서 천추에 빛나리
약한 나라 죄인이요 강한 나라 재상이라
그래도 처지를 바꿔놓으니 이등도 죄인되리
중국 건국 원로로 가장 존경받는 고 주은래 총리 부부 인연을 맺어준 인물도 바로 안 의사라는 사실을 중국인들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1919년 텐진 난카이(南開)대학에서 연극〈안중근〉(일명 '망국한(亡國恨)')을 공연하였는데 열예닐곱 살 주은래(周恩来)와 등영초(邓颖超)는 학생 연극 ‘안중근’으로 만났다. 등은 주를 찾아가 연출을 부탁했고 자신은 남장(男裝)하고 안중근을 연기했다. 주는 훗날 총리가 돼 "청일전쟁 후 중-한 인민의 항일운동은 안중근 의거로부터 시작됐다"고 평가했다.
2014년 한·중이 안 의사 의거 표지석 설치를 협의할 때 일본이 반발하자 중국 외교부 대변인이 "안 의사는 역사 속에서 항일 투사로 매우 유명한 인물이다. 중국인은 그를 존경한다."고 말한 것은 중국인들의 안 의사 평가를 대변하고 있다.
안 의사가 순국한 지 106년이 지났지만, 그의 유해는 아직 고국에 돌아오지 못했다. 순국 당시 안 의사는 동생들에게 자신의 유해를 하얼빈(哈爾賓) 공원에 묻어두었다가 국권(國權)이 회복되면 조국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지만, 이 유언은 실현되지 못하고 있다.
‘사망자 친족이 사체 인도를 요구하면 언제든지 이를 교부할 수 있게 한다’는 감옥법이 존재함에도 일제는“형님의 유해를 돌려받고 싶다”는 두 동생의 간절한 요청에도 그들을 강제 추방하고, 안 의사 시신을 여순감옥 뒷산의 수인(囚人) 묘지에 매장했다.
안 의사 유해가 한국에 환국되면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될 것을 우려했고, 그의 무덤이 항일운동 거점이 될 것이란 정세판단 때문이었다. 국가보훈처는 2008년 3월부터 4월 말까지 안 의사 유해발굴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지금은 중단상태다.
남북이 유일무이(唯一無二)하게 공동으로 존경하는 안 의사는 남북통일 후 민족통합의 구심점이 될 상징적 인물이란 점에서도 하루빨리 유해발굴과 송환에 정부가 적극 나설 것을 촉구한다.
2016 3월 26일, 순국 106주년 아침에, 만고의 영웅이요, 민족의 대의(大義)를 위해 희생한 안 의사 영전에 삼가 머리 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