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人100言]김성곤 “별일 없제?”
2016-02-10 09:00
한국경제의 기적을 이끌어낸 기업인들의 ‘이 한마디’ (26)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팔 게 있으면 팔아야지. 나라가 보증하는 빚을 얻어 쓰고 내자까지 정부에 기댄다면 세상이 웃지 않겠나?”
1967년 성곡(省谷) 김성곤 쌍용그룹 창업자는 1948년 해방 후 자신이 설립한 국내 최초의 방직회사이자 평생을 애지중지 키워온 모태 기업 금성방직의 매각을 결정한 뒤 주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1961년 10월 경제기획원이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실시를 앞두고 ‘외자도입 대상사업자 선정을 위한 공고’를 발표하자, 새로운 사업을 모색했던 성곡은 시멘트 사업에 참여키로 하고 1962년 쌍용양회를 설립했다.
외자 2900만 달러, 내자 46억원을 들여 강원도 삼척군 북평읍 삼화리에 건설하기로 한 새 공장은, 그러나 과잉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으며 자금조달에 어려움을 겪는다.
사람들은 자금이 부족했던 성곡이 다른 기업과 마찬가지로 은행대출로 내자를 조달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성곡은 당시 집권여당인 공화당의 재정위원장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특단을 내린 것이다.
사업은 그러나 권력과는 비교도 안 될 만치 생명이 긴 거야.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지만 날더러 말하라면 정권은 짧고 사업은 영원하다고 바꿔 말하고 싶다.
사업의 생명을 길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투자가 필요한지 바깥사람들은 잘 모른다. 투자란 돈만이 아니다.
정성, 열정, 사람···이게 다 사업에 들어가는 투자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에야 그 사업가는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이다”고 말했다. 보금자리와도 같았던 금성방직을 매각한 사업의 생명을 길게 하기 위한 결단이고 투자였던 것이다.
1913년 경북 달성군에서 태어난 성곡은 1937년 보성전문(현 고려대학교)을 졸업하고 지방공무원과 은행을 거쳐 1939년 27세의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다.
첫 사업은 비누공장이었다. 김성곤 회장은 대구 칠성동에 있는 비누공장을 인수하면서 ‘삼공유지합자회사’를 설립, 일본인들의 텃세를 극복하고 사업을 성공시켰다. 이어 해방 후에는 경성방직을 세워 생활필수품 부족에 허덕이던 국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이바지했다.
“일하자. 더욱 일하자. 한없이 일하자.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를 좌우명으로 삼았던 성곡은 새 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전혀 생소한 분야를 측근들의 반대와 예상되는 자금 조달의 어려움을 극복해냈다. 무모해보였지만 성곡은 속으로 치밀하게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한 끝에 결정을 내린 것이었다는 게 뒤늦게 밝혀졌다.
사람을 좋아했던 성곡은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을 만지며 “별일 없제?”라고 묻곤 했다고 한다. 기업가로서의 바쁜 삶 속에서도 정치와 경제와 스포츠는 물론 언론, 교육계에 이르기까지 그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한국 사회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