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S시대 재조명] 문민정부 개막…“호랑이 굴로 간 김영삼, 마침내 5·16 쿠데타 잔존세력 청산”
2015-11-24 07:56
아주경제 최신형 기자 =겨울 한파가 몰아친 1992년 12월 18일 제14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김영삼(YS) 민주자유당 후보 997만7332표(42.0%), 김대중(DJ) 민주당 후보 804만1284표(33.8%), 정주영 통일국민당 후보 388만67표(16.3%)였다. 문민(文民) 개혁의 상징인 '문민정부'가 마침내 문을 연 순간이다. 천신만고 끝에 민주화의 봄은 그렇게 시작됐다.
◆“문민정부, 군부정권·군사문화 일거에 깨트린 사건”
문민정부는 △군부정권 △군사문화 △수직적 권위주의 등의 낡은 삼각 축을 일거에 무너뜨린 전환점으로 작용했다. 단순히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전두환→노태우'로 이어지는 군부 철권통치를 단절한 것만이 아니다.
YS의 권위주의 타파는 사회 전반의 '자유 신장'으로 이어졌다. 세계화와 맞물린 자유화 정책은 사회 각계각층으로 일순간에 퍼졌다. 역사 복원작업도 이뤄졌다. 초·중·고교 교과서에 기술된 5·16 군사정변을 '쿠데타'로 수정한 것도 이때다. 일제 침략의 상징인 옛 조선총독부 청사도 철거했다. 국민학교도 '초등학교'로 개칭했다. 전국 곳곳의 일제가 박았던 쇠말뚝도 뽑았다. 이후 5·18 광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했다.
하지만 군사독재의 고리를 끊어내기는 쉽지 않았다. 사회 전체에도 큰 '트라우마'로 남았다. 현재도 우리는 '공화국'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YS 정권은 '공화국' 대신 '문민정부'라고 명명하며 새 행정부의 이름을 짓는 데 물꼬를 텄다. DJ 정권도 '국민의 정부'로 불렀다. 이후 '노무현→이명박→박근혜' 정부 등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YS 정권부터 박근혜 정권까지 모두 6공화국 체제 안에 있다. 그만큼 유신독재의 트라우마가 크다는 얘기다.
YS의 민주화 쟁취의 길 역시 순탄치 않았다. 실패도 맛봤다. 1987년 대선 양김(YS·DJ) 분열이 대표적이다. 1980년 서울의 봄과 1987년 6·10 민주항쟁 쟁취에도 불구하고 야권 후보단일화 실패로 정권을 노태우 민정당 후보에게 내준 것이다.
1998년 제13대 총선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YS는 부산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영입하며 절치부심했지만, 원내 제3당에 그쳤다. 영원한 라이벌인 DJ의 평민당에도 밀렸다. YS가 최대 위기를 맞은 것이다. YS에게 승부수가 필요했다.
YS는 1990년 1월 22일, 3당 합당을 결행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의 민정당과 김종필(JP)의 공화당과 손을 잡았다. 민주세력 내부는 격앙됐다. 일각에서는 이를 '야합'으로 규정했다. 지지 철회가 쏟아졌다. YS는 특유의 승부사 기질로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간다"며 정면돌파했다.
호랑이 잡기에 나선 YS의 승부수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90년 7월 민정당 대표에 오른 YS는 '5공 황태자' 박철언과 JP의 공화당 세력에 집중 견제를 받는다. 특히 최대 계파인 5공 후신 '민정계'는 내각제 합의 비밀각서까지 공개하며 YS를 고립무원 처지로 밀어넣었다.
YS는 '당무 거부'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무모할 정도의 승부수였다. 결과는 YS의 승리. 노태우 전 대통령은 YS가 있던 마산으로 내려갔다. YS는 내각제 포기를 요구했고 대통령이 사실상 백기 투항했다.
'5공 황태자' 박철언의 위상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JP도 힘 한 번 쓰지 못했다. 호랑이를 잡으러 간다던 YS는 대선 일주일 전 터진 '초원 복집(노태우 정부의 법무부 장관 등이 지역감정을 일으킨 사건)' 등의 악재에도 불구하고 1992년 12월 18일 DJ를 193만표 차로 꺾고 제14대 대통령에 오른다. 군부 종식 역사의 시발점이다.
최진 경기대 정치전문대학원 교수는 이날 아주경제와 통화에서 "YS는 그 전 대통령과는 다른 리더십으로 난국에 부딪힐 때마다 거침없이 정면돌파하는 승부사적 기질을 발휘했다"며 "군부를 종식한 문민정부는 한국 정치사가 민주화 전과 후로 나뉘는 분기점"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