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딸과 한 남자를 사랑한, '세상끝의 사랑' 한은정

2015-11-12 15:57

영화 '세상끝의 사랑'에서 서자영 역을 열연한 배우 한은정이 서울 팔판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진행한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

아주경제 김은하 기자 = 재혼 남편과 친딸이 나체로 엉켜있는 광경을 본 여자는 종이 인형처럼 쓰러졌다. 정신을 차린 여자는 남편을 향해 "짐승 같은 놈"이라며 비명을 지르더니, 돌연 딸에게 "이 남자는 내 남자야. 너는 나가서 다른 남자 찾아"라고 악다구니를 쓰다가, 갑자기 결심이 선 듯 "나만 여기서 빠지면 되겠네"라며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배우 한은정은 12일 개봉한 영화 '세상끝의 사랑'(감독 김인식·(주)담소필름)에서 친딸과 한 남자를 사랑하게 된 비운의 여인, 자영을 연기했다. 영화는 찰나의 충동을 참지 못했을 때 마주하게 되는 불행을 거칠고 불편하게 그려냈다. 동성애를 다룬 데뷔작 '로드무비'(2002)로 제21회 밴쿠버 국제영화제, 23회 멜버른 국제영화제, 46회 런던 국제영화제에 초청받고, 지난 2004년 개봉한 김혜수 주연의 '얼굴없는 미녀'로 제5회 밀라노 국제영화제 촬영상, 제22회 토리노 국제영화제 관객상을 수상한 김인식 감독의 작품이다.

"어렵지만 욕심나는 책(시나리오)이었어요. 신선하고 충격적이었죠. 이 작품을 해낸다면 내 연기 인생에 분명 도움이 될 것 같은데, 내가 자영의 어둡고 섬세한 감정을 잘 표현해낼 수 있을지 걱정되더라고요. 원래 오래 고민하는 성격이 아닌데 한 달이나 고민했어요. 소비되고 없어지는 내용이 아니라 곱씹을 수 있고 여운이 남는 이야기라 선택했습니다. 김인식 감독님에 대한 믿음도 컸죠. 단순하고 밋밋한 작품을 만드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오랜만에 관객에게 충격 아닌 충격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설레요."

충격적 줄거리만큼이나 생경한 것이 눈두덩이에 퍼렇게 멍이 든 한은정의 모습이다. 영화 '공소시효' 이후 4년 만인 스크린 속 한은정은 어린 나이에 임신했고, 첫번째 남편에게 폭행당하는 매맞는 부인이었으며, 그런 남편에게 친딸을 추행했다는 누명을 씌우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2004년 드라마 '풀하우스'에서 보여준 도도하고 세련된 이미지가 아직 남아있는데 말이다.
 

영화 '세상끝의 사랑'에서 서자영 역을 열연한 배우 한은정이 서울 팔판동에 위치한 한 카페에서 진행한 아주경제와의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사진=유대길 기자 dbeorlf123@]

찬찬히 생각해보면 한은정은 안주하는 법이 없었다. '풀하우스'에서 패션 디자이너를 연기하며 신드롬급 인기를 누린 후 돌연 71부작 시대극 '서울 1945'를 선택, 한복과 죄수복을 입으며 억척스러운 삶을 살아갔다. 2010년에는 하얀 소복에 아홉개의 꼬리를 달고 구미호(구미호 : 여우누이뎐)가 돼 우리의 여름을 책임졌다.

"'구미호 : 여우누이뎐'는 정말 막막했죠. 한국적인 구미호에 섹시한 매력을 입히라는 감독의 주문이 있었거든요. 게다가 모성애까지 겸비해야 했죠. 내가 엄마 역할을 해도 될까? 내가 소복을 입은 모습이 어울릴까? 고민도 했지만, 답은 하나에요. 이미 시나리오는 나왔고 나는 연기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는 거죠"

현대적이고 냉정한 여성 캐릭터는 거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고, 도회적이고 차가운 외모를 지닌 한은정은 거기에 필요한 모든 요건에 부합한다. 한은정이 선택할 수 있는 쉬운 길이 많다는 얘기다. 하지만 한은정은 그러지 않았다.

"부모님이 물려주신 외모에 안주하며 연기를 할 생각은 없어요. 외모에 치중하지 말고 무게감 있게 연기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물론, 쉽게 가려면 쉽게 갈 수도 있겠죠. 하지만 쉽게 얻은 성과가 값지게 느껴질까요? 어렵게 손에 쥔 것들이 고귀하고 진귀해 보이잖아요. 나이가 많은 것도 아닌데 쉽게 연기 인생에 종지부를 찍고 싶지 않아요. 무게감 있고 가치 있는 역할을 많이 할 겁니다. 물론 외모에 가려져 제가 가는 길이 대중에게 쉽게 보이지 않을 수도 있어요. 조급함은 없습니다. 천천히 알려드리면 되니까요. 제가 한눈팔지 않는다면 사람들도 '한은정이 이런 친구구나'하고 알아주시겠죠."

한은정은 "김인식 감독이 자영 역으로 진중하고 무거운 느낌을 똑 부러지게 연기할 배우를 찾았단다. 그 역할이 내게 왔다는 것이 내가 원하는 바를 이뤄가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일 하지 않고 쉰 적도 있었죠. 사는 게 재미가 없더라고요. 피곤해도 바쁘게 일할 때가 가장 행복해요. 언론 시사에서 '세상끝의 사랑'을 보고 난 뒤 '다음엔 또 무슨 역할에 도전할까?'라는 생각에 심장이 쿵쾅거리더라고요. 아직 영화 개봉도 안 했는데 말이에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