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여성이여 춤을 추자, '댄싱 마마'

2015-10-19 16:01
코리아나미술관 하반기 국제기획전
여성주의 미술의 새로운 흐름 다뤄

홍이현숙, '폐경의례, 폐경 파티를 위한 현수막', 2012. [사진=조가연 기자]


아주경제 조가연 기자 =마포구 거리 어딘가, 평범한 현수막들 사이로 "나의 몸이 폐경(閉經)을 하였습니다. 당신의 폐경은 어떠신지요?"란 낯선 문구가 눈에 띈다. 행인은 그 문구가 아무렇지 않은 듯 무심히 그 앞을 지나간다. 또 다른 장소의 현수막엔 "나는 아무 준비도 없이 폐경을 맞이했습니다. 어떡해야 좋을까요?"란 글이 적혀있다.

게시대 곳곳을 장악한 이 낯선 현수막들은 작가 홍이현숙의 작품 '폐경의례, 폐경 파티를 위한 현수막'이다. 여러 장의 사진으로 이어지는 연작 '폐경의례'는 작가의 개인적 경험에서 나왔다고 한다. 홍이현숙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자신의 폐경 경험을 '커뮤니티 아트(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예술)' 형식으로 풀어내며 폐경에 대한 여성의 신체적, 심리적 변화를 표현한다.

'폐경의례, 혼자 공부하는 축지법'에선 흔히 말하는 '아줌마 원피스' 차림의 작가가 등장해 지붕과 지붕 사이를 날아다니듯 뛰어넘는다. '월경이 닫히는 것(閉經)'이 아닌 '경계를 허무는 것(廢境)'으로서의 폐경을 이야기하기 위해 직접 축지법을 배웠다고 한다.

'남의 집 담에 올라가 놀기'에선 작가가 거주하는 연희동 주택가를 활보하며 담을 뛰어넘는 퍼포먼스를 펼친다. 아슬아슬하지만 자유롭게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의 모습에서 폐경의 상실감을 극복하고 유머러스하게 대처하는 그만의 내공이 느껴졌다.
 

안은미,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 2011. [사진=조가연 기자]


어두운 복도를 지나니 흥겨운 잔치가 펼쳐졌다. 맞닿은 벽에 설치된 두 개의 스크린에서 할머니들의 춤사위가 이어진다. 중간중간 젊은 무용수들이 등장해 팔을 앞뒤로 흔들며 리듬을 탄다. 빨간 내복, '월남치마', '몸빼 바지' 등 옷차림도 영상 속 할머니들과 꼭 닮았다. 신명 나는 몸짓과 흥겨운 음악에 보고 있는 사람도 엉덩이가 절로 들썩인다.

현대 무용가 안은미의 '조상님께 바치는 댄스'는 일 년 동안 전국을 일주하며 만난 할머니들의 몸짓을 기록하고 이를 다시 전문 무용수들과 공연한 작품이다. 할머니들의 몸짓은 매끄럽지도, 세련되지도 못했다.

그러나 지나온 세월을 고스란히 담은 그들의 몸짓은 소박하면서도 뜨거운 생명력과 강한 에너지를 전달했다. 질곡의 세월을 압축해놓은 듯한 춤사위 덕분에 프랑스 3대 페스티벌인 '파리 여름축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코리아나미술관이 선보이는 하반기 국제기획전 '댄싱 마마(Dancing Mama)'는 홍이현숙, 안은미와 같은 여성주의 작가들을 한자리에 모았다.

본래 여성주의(페미니즘)는 예술의 오랜 주제였고 여성 작가들에게 신체는 중요한 예술의 매개체였다. 1970~1990년대까지의 페미니즘 아트는 대부분 남성의 시선으로 대상화되고 그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의 신체를 주된 소재로 삼았다.

이 시기의 여성 신체 퍼포먼스들은 가부장 이데올로기에 공격적이고 가학적인 몸짓으로 대응하는 '저항의 제스쳐'가 주를 이뤘다. 오노 요코는 나체가 될 때까지 가위로 옷을 찢어댔고 이불은 거꾸로 매달려 피를 흘렸다.

그러나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크고 작은 변화가 감지됐다. 유머를 더한 초현실주의적 코드로 가부장적 질서와 현실의 문제를 전복하거나 인류학적인 분석을 시도하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코리아나미술관의 '댄싱 마마'는 이런 흐름에 주목해 기획됐다.
 

멜라니 보나요, '가구와 결합된 신체' 시리즈, 2007~2008. [사진=조가연 기자]


이번 전시에는 다양한 국적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서양과 중동의 변방에서 터키 여성들의 욕망을 이야기하는 인치 에비너, 덴마크의 대표적인 여성 신체 퍼포먼스 작가인 커스텐 저스테센, 과테말라 출신으로 자신의 신체를 통해 고통과 폭력에 항거하는 레지나 호세 갈린도 등의 작품을 선보인다.

캐나다의 대표적인 여성 퍼포먼스 작가 콜레트 어반은 억압의 구조를 초현실주의적이고 해학적으로 풀어냈다.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긴 팔로 지구본을 잡으려는 모습을 통해 여성의 몸을 마음대로 통제하려 하는 가부장제의 이면을 이야기한다.

멜라니 보나요는 사진과 퍼포먼스, 비디오 작품 등을 통해 기술진보와 상품이 가져다주는 쾌락에 물든 사회를 꼬집는다. 누드의 여성을 청소도구나 버려진 물건과 함께 놓고 현대 사회에서의 신체, 젠더, 계급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선보이는 여성 작가들은 다양한 방식을 통해 저항적인 여성주의를 넘어서고 그동안 여성주의에 덧씌웠던 '스테레오타입(고정관념)'을 극복하고 있다. 전시 이름처럼 여성이 제대로 춤을 추며 여성 신체에서 나온 고유의 언어로 자생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전시는 12월 5일까지. 02-547-91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