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공영 포스코 명장 “돌을 뚫은 빗방울 같은 노력으로 최고의 자리 올라”
2015-10-05 16:59
아주경제 채명석 기자 = “하찮은 빗방울이라도 오랜 세월 지속적으로 떨어지면 단단한 돌도 뚫을 수 있습니다. 즉, 어떤 일이건 꾸준히 매진하면 일가를 이룰 수 있습니다.”
김공영 포스코 포항 스테인리스 제강부 4제강공장 명인은 ‘우수천석(雨垂穿石)’이란 사자성어를 가슴에 품고 28년간 이를 실천해 지난 8월 산업현장 종사자 가운데 최고의 숙련 기술자에게 수여하는 상이자, 기술인들 중 ‘최정점’에게 주어지는 칭호인 ‘2015 대한민국 명장’(금속재생산 부문)에 선정됐다.
김 명장은 포스코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인 ‘헬로 포스코’를 통해 명장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했다.
국익을 위해 죽을 각오로 무장하고 나선 포스코 창립요원들에게서 어릴 적부터 동경해오던 화랑의 기상을 느꼈지만, 불이 당겨진 열정의 종착점은 아직 불분명했던 시기. 그 때 연봉학 기성(技聖)의 초빙 강연을 들은 김 명장은 철강인이 돼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당시 연봉학 기성에게선 제 짧은 표현력으로는 결코 담아낼 수 없는 깊이가 느껴졌다. 요샛말로는 아우라(aura)랄까? 아무튼 형언하기 힘든 특유의 분위기가 있었다. 시성이나 악성은 들어봤지만 기성이라니 불현듯 가슴이 뛰었다. 그때 ‘이 길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온갖 역경을 딛고 100t 전로 국산화를 달성한 기성의 선명한 발자국을 좇아서 저도 한번 철강 장인(匠人)이 돼보기로 맘을 먹었다”고 말했다.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불거졌다. 활달한 성격으로 어느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지내던 사교성이 장점이었지만 계급, 내규 등 여러 준거 기준 안에서 사람을 대하는 일은 젊은 김 명장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었다. 입사 후 초반 몇 년 동안은 조직에 용해되지 못하고 제 자신에게로만 침잠됐던 시절이 이어졌다.
흔들리던 김 명장을 잡아준 것은 본가에서 맞닥뜨린 사자성어 ‘우수천석(雨垂穿石)’이었다. 한학자이던 아버지 친구 분께서 아버지에게 선물한 글씨였다. 이를 접한 그는 “불쑥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제게 훌륭한 나침반이 돼줄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 아버지께 말씀드리고 집으로 가져와 거실 가장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두었다. 지금도 매일 출퇴근할 때마다 살피고는 방향을 체크한다”고 설명했다.
마음을 다잡은 김 명장은 진정한 ‘쇠장이’가 되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다. 그가 능력을 발휘한 분야는 스테인리스스틸(STS)이었다. 1990년대 초까지 우리나라는 연간 25만t에 달하는 STS핫코일을 수입하고 있었다. 포스코는 1986년 STS 사업부를 발족하고 1990년 7월 제강서 냉연에 이르는 STS 일관생산체제를 구축, 수급 불균형 타파에 나섰다. 뛰어난 내식성, 미려한 외관과 더불어 고부가가치를 창출한다는 점에서 STS는 장차 회사의 미래를 짊어질 기린아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STS 생산과정은 많은 기술과 노력을 필요로 했다. STS강은 녹이 슬지 않도록 하기 위해 정련 과정에서 니켈, 크롬 등 고가의 합금철이 다량 투입된다. 당연히 제조원가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자그마치 80% 정도된다. 1990년대 초 니켈 가격이 폭등하면서 전 세계 STS강 시장이 얼어붙었다. 당시 김 명장에게 주어진 취련 작업은 용강의 특성을 감안해 이 값비싼 성분들을 조정하는 역할이었는데, 첨가된 합금철의 실수율을 높이는 게 지상목표였다.
“제 손끝에서 당시 제 월급 정도가 왔다 갔다 했다”고 당시를 회상한 그는 “기필코 원가절감을 이뤄내겠다는 일념으로 매달렸다. ‘미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던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님 말씀대로 한번 미쳐보니 슬슬 길이 보였다”고 말했다. 김 명장의 이름이 매번 실수율 수위에 오르면서 ‘취련은 김공영’이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이렇듯 일을 하는 틈틈이 공부에도 매진해 김 명장은 철야금기술사, 제강기능장, 산업안전기사 등 9개 종목의 자격증을 취득했으며, 스테인리스강과 관련한 9건의 특허를 출원하는 등 포스코 스테인리스강 제조기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김 명장은 지금 후배들 양성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 “포스코라는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많은 덕을 봤다. 이젠 제가 입은 그 후광에 보답할 차례다. 묵묵히 후배들이 가는 길을 비춰줄 요량이다”며 “30여 년 전, 당돌하던 고등학생 시절에 수립했던 목표는 어느 정도 이뤘다. 하지만 대한민국 명장 김공영으로서의 목표는 최근에 막 세웠다. 저희 파트에서 제2, 제3의 명장을 배출하는 것. 이제 그걸 향해 뛰어볼 참이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