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인사이드] 하도급 그리고 공정위

2015-04-06 06:00

[사진=아주경제신문 이규하 차장 ]

아주경제 이규하 기자 =“우리는 큰 건을 계약하지 않습니다. 자칫 무리하게 일을 벌였다가 망하는 납품제조사들을 많이 봤거든요” 이는 지난 2월 기자가 시화공단에서 만난 A 제조 중소업체 생산직 관계자의 말이다. 때마침 정재찬 공정거래위원장도 경기 시화공단 내 B 자동차 부품 제조 중소업체의 생산 현장을 둘러보고 있을 당시다.

이 생산직 관계자는 과거 연 매출액 100억에 달하는 제조납품회사를 운영하는 등 이른바 동네에서 잘나가던 사장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하지만 자신의 운명이 5년 전 한 대형 기업의 발주를 받은 뒤로부터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당시 큰 계약 건으로 왜 기뻐했을까... 뜬금없이 큰 계약이 들어오면 의심해야해요. 하도급 대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경우가 수두룩합니다. 제법 큰 발주물량을 맞추기 위해 빚으로 기계를 증설하고 인원과 인건비를 늘려 하루 종일 돌려도 결국은 하도급 횡포로 폐업하는 경우죠”

“하도급대금을 제때 안주면 자금 흐름이 원활하지 않거든요. 빚을 막기 위해 여기저기 동분서주하다보면 입에서 단내가 나요. 하나 둘 곁을 떠나고 재정 악화로 폐업을 할 때쯤이면 주머니에 담배 한 개비도 없더라고요”

“신고요? 신고하면 기약이 없어요. 언제 망할지 모르는데 결과가 나오기까진 2년이란 시간이 훌쩍 넘어요. 반 폐인이 된 상황에서 소송이고 나발이고 기력이 있겠습니까. 이미 망하고 난 후인데” 그나마 겨우 몸을 추슬러 시화공단까지 오게 된 그의 사연은 TV 프로그램에서 보던 인생 역전의 드라마가 따로 없었다.

최근 들어서는 원사업자들의 꼼수가 교묘해지고 있다.

공정위가 5일 공개한 등산전문업체 에코로바의 하도급 횡포를 보면 혀를 내두를 정도다. 메아리 아웃도어 자회사 뒤에 숨어 하도급 계약부터 부당발주 취소까지 조정한 사실이 공정위 조사결과 드러났기 때문이다. 1차 하도급 대금은 일부만 떼 주고 2차 물량을 마치지 못했다는 이유로 발주를 취소한 경우다. 이 납품회사도 에코로바의 횡포를 공정위에 신고했고 결국 2년 후 제재를 이끌어냈지만 폐업하고 난 뒤다. 우리가 신던 에코로바 등산화 이면에는 우월적 지위에 무너진 한 영세업체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에코로바는 자회사인 메아리 아웃도어를 앞세웠다. 수급사업자 연간매출액 및 상시고용종업원 수가 상대적으로 많은 메아리 아웃도어를 통하면 하도급법 적용대상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위는 조사 과정에서 원사업자가 모회사 에코로바임을 밝혔고 원사업자의 하도급법 적용 회피에 대한 심사도 강화했다.

그러나 늘 뒷맛은 개운치 않다. 기자가 공정위를 출입하면서 자주 듣는 영세업체들의 하소연은 비단 원사업자들의 횡포뿐만 아니다. 공정위의 뒤늦은 대응을 지적하는 이도 많다. 조사 결과 대부분은 2년이 훌쩍 지난 후다. 이미 폐업한 신고인으로서는 씁쓸한 웃음만 나올 뿐이다.

공정위가 조직 및 인력 부족 등의 이유로 사건 처리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는 문제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공정위의 역할은 커지고 있지만 여전히 풀지 못한 과제 임을 오히려 신고인들이 더 잘아는 시대가 됐다.

지난달 건설업종의 중소수급사업자와의 간담회를 통해 나온 뜻밖의 건의도 이러한 부분이다. 이들의 요구는 건설공사가 많은 경인지역에 공정위 지방사무소를 추가로 설치해 달라는 것이었다. 중소전문건설업체들이 신고 조사를 수행하는 서울사무소 하나로 역부족이라는 점을 정부에 지적한 셈이다.

공정위의 조직신설·인력충원 요구는 어제오늘만의 얘기는 아니다. 하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 그토록 공정위가 요구해온 지방사무소 추가설치를 업계가 건의하고 나섰다는 점이다. 이제 행정결정권자는 그들의 요구를 들어줄 때가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