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영화 ‘파울볼’, 누가 그들을 패배자라 부르는가
2015-03-17 09:55
설재훈은 고양 원더스에서 1093일을 보냈다. 아니다. “야구가 삶의 전부냐”며 짐을 싸오고 나온 기간은 빼야겠다. 그마저도 잠시뿐이다. “네가 가서 (김성근) 감독님께 빌래? 아니면 이 애비가 가서 감독님 앞에서 무릎을 꿇을까?”라는 아버지의 말에 바로 다시 입단했다. 프로를 꿈꿨다. 안형권과 방을 쓰며 “5월에는 프로에 가겠다”고 자신했던 그들은 부상으로 그라운드에 나가보지도 못했다. 안형권이 물었다.“너 야구 계속할 거야?” 설재훈은 “나는 한번 (고양 원더스를) 나가봤잖아. 나는 프로 안 돼도 여기 남을 거야”라고 답했다. 기쁨도 슬픔도 함께할 것이라고 믿었던 안형권은 직전 롯데자이언트의 부름을 받았다. 씁쓸함을 지우지 못하고 돌아온 팀은 해체를 통보했다.
조정래, 김보경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파울볼’은 야구에서 다시 칠 수 있는 기회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패자부활을 꿈꾸는 사람을 담았다. 카메라는 집요하긴 해도 기교를 부리지 않고, 투박한 등장인물들 사이엔 갈등이 없다.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는 법도 없다. 비실대던 하체가 근육으로 단단해지고 미숙했던 스윙이 단련되는 시간을 참을성 있게 담아냈다. 김보경 감독은 “영화를 기획할 당시 고양 원더스를 통해 ‘패자부활’ ‘다시 한다’ ‘다시 기회가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걸음마를 방금 뗀 아이처럼 까치발로 허우적거리고, 목이 앞으로 쏠린다고 등에 빗자루를 꼽고 붕대로 칭칭 감아 목에 고정시키고, 감독이 정수리를 잡고 있으면 발레리나처럼 빙글빙글 도는 그들의 처음은 정말이지 오합지졸 만화 같다. 그라운드의 모래 먼지, 토해내듯 뱉어내는 거친 숨소리, 낮게 중얼거리는 욕지거리, 굵은 땀방울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다.
‘야신’ 김성근 감독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흔이 넘은 몸으로 선수들과 함께 야구공 박스를 나르고 뛰고 달린다. 선수들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를 잡으려고 죽을 힘을 다한다. 김 감독은 프로에 뽑혀 가는 선수들이 “고맙다”며 절을 할 때마다 애써 눈물을 삼킨다.
프로에 뽑히지 않은 현실이 최악일 줄 알았는데…팀은 그보다 나쁜 해체를 알린다. 갈 곳을 잃은 그들은 해체 후에도 그라운드를 지켰다. 야신은 술잔을 기울이며 “내가 야구만 할 줄 알았지 정치를 못 한다. 고양 시장을 만나봐야 하나”면서 허공을 바라봤다. “지금 이 순간 펑고(선수들의 수비 연습을 위해 공을 쳐주는 것)가 너무 치고 싶다”는 노장의 말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김보경 감독은 “팀이 해체할 때 원래 하려던 이야기가 완전히 엎어졌기 때문에 제작진 역시 선수만큼 크게 절망했다”고 했다. “하지만 팀이 해체되고 나서도 연습을 하러 나오는 선수를 보면서 ‘우리가 원래 하려던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면서 “그들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팀이 해체했는데 왜 연습하느냐? 미련하다고’ 얘기하더라. 하지만 나는 끝까지, 마지막까지 연습하는 선수를 지켜보면서 원래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다시 찾았다.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딛고, 이기고, 아침에 연습장으로 나오는 것 자체가 패자부활”이라고 피력했다.
김보경 감독 말이 맞다. 최후까지 고양 원더스의 홈구장을 지켰던 설재훈은 팀 해체 이듬해 SK 와이번스 소속이 됐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