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칼럼]비상금 확보 비상

2015-02-01 01:57

아주경제 워싱턴 특파원 홍가온 기자 =한달 전 쯤 영국에서 재밌는 조사 결과가 있었다.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비자금에 더 욕심을 낼까에 관한 조사였다.

조사대상 2000명 중 63%가 배우자 몰래 비자금을 갖고 있다고 답했는데, 남자보다 여자가 비자금을 갖고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솔직히 의외였다. 남편이 벌어 오는 빠듯한 월급을 쪼개 저축도 하고 알뜰하게 살림을 하는 여자와, 부인 몰래 딴주머니를 차고 있는 남자의 모습을 한국에서 흔히 봐왔기 때문이다.

오랫만에 만난 친구와 소주 한잔 하고 싶은데 아내가 준 용돈은 벌써 다 써버렸을 때, 그때 남자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며 비애감을 맛본다. 

그래도 평소 몰래 감춰놓은 현금이 있거나 카드라도 있을라치면 괜히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 우리의 아버지들이 그렇게 살았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렇게 하면서 살고 있다. 

배우자를 속인다는 측면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하겠지만 궁색한 처지를 살려 준다는 면에서는 꼭 필요한 게 비자금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영국은 한국과 사정이 다를 수 있겠지만, 아무튼 갑작스레 돈이 필요할 때를 위해 배우자 몰래 비자금을 마련하는 것은 마찬가지인 것 같다.

비자금과 달리 배우자도 함께 알고 있는 '딴주머니'가 있는데 이것은 비상금이라고 한다.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을 때 배우자와 함께 사용할 수 있는 돈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비상금의 변천사를 보면 또 재밌다.

2012년도 미국언론 보도를 보면 당시 미국인의 절반 가량은 위급상황이 발생했을 때 필요한 비상금 2천 달러(약200만원)를 마련할 경제능력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달 초 미국의 금융정보사이트 뱅크레이트가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미국인 중 62%가 응급실에 가기 위한 1000달러(약 109만원))나 자동차 수리비 500달러가 없다고 답했다 한다.

경기침체의 여파가 그대로 드러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저출할 돈도 없는 상황에서 비상금을 꿈도 꾸기 어렵다는 것이다.

2년전 미 연방준비제도가 벌인 설문조사 결과는 힘든 미국인들의 생활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성인 조사대상 4000명 가운데 불경기 이후 많은 가정에서 저축은 거의 고갈됐다는 결과가 나왔다.

2008년 이전에 저축했던 사람 중 57%는 불경기와 그 여파로 저축금의 일부나 전부를 사용했다고 답했다.

응답자의 39%만이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3개월간 사용할 수 있는 저축금이 있으며 48%는 긴급자금을 위해 400달러가 있다고 했다.

많은 미국인들이 경기침체의 영향으로 늘어난 빚 때문에 저축을 못하게 되고 비자금은 더더군다나 못하게 된 것이다.

심지어 지난 해 말쯤 재닛 옐런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은 단돈 400달러도 비상 지출하기 어려운 미국인이 많다고 개탄하기도 했다.

소득불균형의 확대로 인한 빈부격차가 더욱 심해지는 양상이어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지 오래다.

그래도 빠듯한 살림을 쪼개 비상금을 마련하는 이들도 있긴 하다.

무너진 금융가에 대한 불신과 유명무실한 은행 예금이자로 인해 은행을 떠나는 미국인들이 많다.

대신 이들은 집에다 현금을 쌓아놓고 있는 실정이다. 아메리칸 익스프레스가 죄근 벌인 조사를 보면 미국인의 53%가 은행이 아닌 곳에 비상금을 현금으로 보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침대 매트리스 밑이나 냉동실, 양말 서랍장, 과자병에 현금을 보관한다고 하니 은행이 이것들만도 못한 셈이 되어 버렸다.

실제로 지난 2009년에는 한 여성이 자신의 어머니가 침대 매트리스 밑에 비상금을 숨겨 놓은 사실을 모르고 바려, 어머니가 평생 모은 돈 100만 달러를 일허버린 일도 있었다.

점점 벌어지는 소득격차와 빈부격차와 함께 미국내 서민들의 삶은 어두운 터널에서 빠져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 대책마련이 시급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