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초대석] 김귀열 슈페리어 회장,“최경주 발굴에 보람, 골프박물관·슈페리어재단 통해 사회에 기여해야죠”

2014-10-21 10:24
창업후 47년간 골프 의류 한 길…무차입 경영으로 정평 나

김귀열 슈페리어회장은 "골프사업으로 돈을 벌었으니 골프를 위해 이익을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말한다.                                                                           [사진=슈페리어 제공]




"1967년 창업 후 골프의류 한 길 걸어
반세기동안 ‘무차입 경영’으로 정평
갓 프로된 최경주 ‘눈매’보고 후원 결정
스포츠 마케팅 성공 사례로 자부심
올해초 강남에 세계골프박물관 만들어
‘받은 것은 돌려준다’는 좌우명 실현"




프로골퍼 최경주(SK텔레콤)가 한국 남자골프의 ‘간판’으로 자리잡기까지는 본인의 노력 외에도 많은 사람들의 뒷받침이 있었다. 최경주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던 시절, 그에게 잭 니클로스의 골프레슨책을 선물한 사람도 있고, 알게모르게 대회 출전 경비를 대준 사람도 있었다.

골프의류 브랜드 ‘슈페리어’의 김귀열 회장(72)도 최경주의 성장사에서 빼놓을 수 없다. 김회장은 최경주가 프로로 데뷔하고 1년 후인 1995년 최경주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그 인연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최경주는 지금도 ‘SGF’(슈페리어골프패션) 로고가 선명한 슈페리어 옷을 입고 플레이한다. 슈페리어와 합작으로 자신의 이름을 딴 의류 브랜드(KJ초이골프)도 선보일 정도다.

“1967년 창업했고 1979년 ‘슈페리어’라는 골프의류 브랜드를 론칭했지요. 당시 슈페리어는 세 가지 특이점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옷 소재가 혁신적이었고, 외국인 모델을 처음 썼으며, 외제가 판치던 국내시장에서 국산 브랜드의 골프의류로는 최초였어요. 처음에 잘 됐습니다. 골프의류로 국내 시장에 연착륙하다 보니 골프계에 이바지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후원선수를 물색했는데 최 프로가 눈에 띄었습니다. 눈매가 매섭고, 뭔가 잘 할 것같은 인상이었습니다. 계약서에 사인한 후 ‘운동만 열심히 할 수 있게 해주어 감사하다’고 화답했던 최 프로의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네요. 최 프로는 기대에 부응해 미국PGA투어에서 8승을 올리며 세계적 선수가 됐습니다. 슈페리어가 스포츠 마케팅의 첫 상대로 최경주를 선택한 것은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합니다.”

김 회장은 슈페리어 브랜드를 론칭하기 4년 전 골프를 배웠다. ‘골프 웨어 사업을 하는 사람이 골프를 몰라서야 되겠는가?’는 생각 때문이었다. 고희(古稀)를 넘긴 지금도 핸디캡 12∼13을 기록할만큼 ‘상급’ 아마추어골퍼다. 베스트 스코어는 1오버파 73타다. 최경주가 마스터스에서 최고성적(3위)을 낸 2004년 개최지인 미국 조지아주 오거스타내셔널GC에서 라운드한 것과 금강산골프장에서 라운드한 것이 가장 인상에 남아있다고 한다.

한 평생 골프와 인연을 맺다 보니 골프 예찬도 남다르다. “예전에는 어느정도 성공한 부류의 사람들은 골프를 했습니다. 요즘에는 젊은이들 생각이 달라진 듯해요. 골프를 좋아하지만, 아내와 가족들 눈치를 보느라 맘껏 골프를 즐기지 못하는 듯합니다. 골프가 재미있지 않습니까. 자연을 바로 옆에 두고 하는 운동이잖아요. 노년기 운동으로 골프만한 종목이 없다고 봅니다. 특히 은퇴한 사람이나 시간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 골프는 정말 좋은 운동이라고 봅니다.”

그는 골프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자신의 골프 비즈니스에 대해서도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해외 유명 브랜드나 라이선스 제품이 즐비한 골프의류 시장에서 슈페리어라는 ‘토종 브랜드’로 35년째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까닭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브랜드로 발돋움하지는 못했지만….

김 회장은 올해초 슈페리어 사옥 지하에 세계골프역사박물관을 꾸몄다. 골프에 입문한 후부터 해온 자신의 골프 컬렉션에 한국프로골프협회 한국여자프로골프협회, 그리고 주위사람과 많은 프로골퍼들의 협조를 얻어 골프 고품·진품 1200여 점을 한 자리에 모은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전문박물관으로 골프에 대한 열정, 많은 품목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없으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박물관의 역사에 비해 골프 진품을 많이 갖다놓았습니다. 골프 초창기 스코틀랜드 골퍼들이 쓰던 장비부터 아놀드 파머, 게리 플레이어, 잭 니클로스 등 ‘빅3’ 시대, 그리고 최근의 타이거 우즈까지 골퍼들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박물(博物)들입니다. 그 가운데는 니클로스가 사용하고 사인까지 해놓은 클럽도 있습니다. 니클로스는 2005년 마지막으로 브리티시오픈에 출전한 후 은퇴를 발표했는데, 당시 영국 정부에서 그를 기념해 파운드화를 5만장 한정발행했지요. 그 중 하나도 구해놓았습니다. 한국골프의 역사는 고종의 아들 영친왕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어찌보면 일본보다 길지요. 1941년에 고(故) 연덕춘옹이 일본오픈에서 우승할 정도 아니었습니까. 그 편린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골프를 좋아하는 분들은 한번 와서 보시고 평가도 해주기를 바랍니다.”

그는 “한 해 미국PGA투어에 걸린 상금만 3000억원에 달합니다. 미국PGA투어와 LPGA투어에 출전한 한국 선수들이 벌어들이는 상금 수입만도 1900억원정도이어요. 우리 선수들의 해외 골프투어 진출에 따른 경제효과가 중형차 7700대를 수출하는 것과 맞먹습니다. 골프 하나만 잘 쳐도 국익에 크게 기여하는 세상이 됐죠. 박물관 개관과 더불어 그런 사실도 널리 알리고 싶습니다.”고 설명한다.

한국 골프는 선수들이 기량이나 골프인구 및 열기 면에서 세계에서도 손꼽을만한 위치에 다다랐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면 아직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국골프가 해결해야 할 급선무에 대해 김 회장의 생각은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국 골프 열기가 뜨겁고 2016년엔 올림픽에서도 골프가 열리지 않습니까. 그러나 비싼 그린피(골프장 입장료) 때문에 더많은 사람들이 골프를 즐기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진정한 골프대중화를 위해서는 그린피에 붙는 개별소비세나 골프장에 부과되는 중과세를 해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국골프가 한단계 더 발전하고 성숙해질 겁니다.”

골프 덕분에 사업을 번창시키고 누구보다 건강한 삶을 살고 있는 그이기에 앞으로도 한국골프의 발전에 더 기여하고 싶은 것이 작은 바람이다.

“지금까지는 최경주 한 사람에게 집중지원했습니다만 앞으로는 더 많은 선수들을 지원하고 싶어요. 또 여지가 있으면 골프대회도 열려고 생각중입니다. 사실 우리는 초창기 슈페리어오픈을 5회(1995∼2000년) 열었지요. 남자골프 최강전도 SBS와 함께 3년정도 공동주최한 역사가 있습니다. 한국골프는 요즘 여자에 비해 남자대회가 처지고 있어요. 매사는 균형을 이루는 것이 좋은데, 한국 남녀골프대회는 한쪽으로 너무 쏠렸습니다. 남자 프로골퍼들도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하지만, 주위에서도 남자대회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다시 골프대회를 연다면 남자대회를 할겁니다.”


 ◆김귀열 회장은

47년전인 1967년 의류업체 ‘동원섬유’를 창업한 후 반세기 가까운 세월동안 한 길을 걸어온 사업가이자 골프마니아다. 그가 일군 슈페리어의 대표적 브랜드 ‘SGF 67’에서 67은 창업연도를 의미하기도 하고 골퍼들에게 ‘꿈의 스코어’인 67타를 뜻하기도 한다.

그는 창업 이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빚을 지지 않고 기업을 운영해온 것으로도 유명하다.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돈을 빌려 쓰는 게 두려웠어요. 남의 돈을 안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경영했죠. 경기가 좋았을 때 차입을 했더라면 회사가 더 커졌을지 모르겠지만 후회는 없어요. 회사가 위기에 직면하고 부도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반세기 가까운 시간, 완만하지만 안정적으로 성장해왔다는 점에 만족해요.”

독실한 기독교 신자(장로)인 그는 서울 강남 복판에 사옥 두 개를 마련할 정도로 ‘성공’했다. ‘받은 것은 돌려준다’ ‘남을 위해 얼마나 봉사했는가’를 좌우명으로 삼아온 그는 올해초 136억원을 기본 자산으로 삼아 슈페리어재단도 만들었다. 재단을 통해 어려운 이웃,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사람, 참교육으로 인재를 육성하는 이들을 후원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세계골프역사박물관도 그 일환으로 재단설립과 동시에 세웠다.

그의 멘토는 고(故) 한경직 목사다. 고향을 떠나 서울에 와 어렵고 힘든 시절 한 목사의 설교와 가르침 덕분에 어려움을 극복하고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고 한다. 재단과 골프박물관 설립의 동기를 부여한 사람도 한 목사였다. “골프사업으로 돈을 벌었으니 이제 책임을 다해야 할 차례죠”라고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것도 한 목사를 만났기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