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중국역사>3월5일 저우언라이 탄생 등
2014-03-02 16:18
아주경제 한오종 기자 =
▲3월3일(월) - 1971년, 중국 인공위성 발사 성공
중국이 중국 최초의 과학실험용 위성 ‘실천1호(實踐一號)’의 발사에 성공했다.
이로부터 40년 뒤인 2011년 10월 중국은 미국,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우주 도킹에 성공하며 우주 개발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다. 또한 2013년 12월에는 달 탐사위성 창어 3호를 달에 착륙시키는데 성공했다. 이 역시 미국, 소련에 이은 세계 세 번째 성과다.
▲3월3일(월) - 1981년, 다롄시 이름 개칭
다롄 개칭 전 뤼다시 전경
다롄(大連, 대련)시의 명칭이 뤼다(旅大)시에서 다롄으로 바뀌었다. 국무원은 이날 뤼다시의 명칭을 다롄시로 개칭하는 안을 비준했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다롄은 모두 주요 전장이었고, 러시아와 일본 제국주의의 점령지로 약 50년의 세월을 보냈다. 1910년 일본 점령후 이곳을 다리니에서 한자 발음인 다롄으로 불렀고, 일본 투항 후 1950년 서쪽의 뤼순(旅順)과 합병하여 뤼다시로 명명 되었다.
현재 다롄은 새로운 변화를 앞두고 있다. 2026년 완공을 목표로 다롄과 산둥(山東)성 옌타이(煙臺)시를 연결하는 123km 길이의 해저터널 건설이 계획중이다. 완공되면 현재 배로 8시간 걸리는 두 도시간의 거리가 열차로 40분 만에 이동할 수 있게 줄어든다.
▲ 3월4일(화) - 1885년, 조선 갑신정변 처리 ‘천진조약’ 체결
청국과 일본이 천진(天津)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조선의 갑신정변 뒤처리를 위한 조약으로 청, 일 두 나라 군대가 조선에서 철군하고 향후 출병시 서로에게 통보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구체적으로는 청,일 양국이 4개월 이내 조선에서 철병할 것, 조선국왕에게 자위군을 양성토록 하되 훈련교관은 청일 두 나라 외에서 초빙할 것, 파병시 먼저 문서로 연락하고 사태 수습 후 다시 철병할 것 등이었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 대해 청과 동등한 권한을 갖게 되고 향후 한반도 식민화의 기초가 된다.
▲ 3월5일(수) - 1898년, 중국 최고의 외교관이지 총리 ‘저우언라이’ 탄생
저우언라이 총리와 그의 부인 덩잉차오
노련한 외교관, 유능한 행정가, 헌신적 혁명가, 실용적 정치가로 중국인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지도자 저우언라이(周恩來, 주은래)가 탄생했다.
장수(江蘇)성 화이안(淮安)현에서 태어나 선양(沈陽), 톈진(天津) 난카이 중학 등에서 학업을 했다. 톈진의 난카이대학 재학 중 5·4운동에 참가해 투옥, 퇴학당했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22년 중국공산당 파리지부(支部)를 창설했고, 1927년 북벌군에 호응하는 상하이(上海) 봉기를 지도했다.
이후 1936년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을 거쳐 1949~58년 중국 공산당 외교부 부장을 역임했고, 1954년~76년까지 인민정치협상회의의 의장, 1949년~76년까지 초대 총리를 역임했다. 1976년 1월8일 타계하면서 모든 직을 내려놓게 된다.
그는 뛰어난 외교 역량을 발휘 1970년대 미중 국교정상화를 주도했다. 미국의 안보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1971년 8월 비밀리에 베이징을 방문 저우언라이 총리와 회담을 가졌고, 그 결과 1972년 2월 21일 리처드 닉슨 대통령과 마오쩌둥 간의 미중 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성실성과 친화력으로 인망을 얻었으며, 만년의 마오쩌둥(毛澤東)은 그를 경계하였으나 2인자임에도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마오쩌둥을 성실하게 보좌하여 애국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한편 그와 아내 덩잉차오(鄧穎超)는 자식이 없어서, 혁명기간 중 부모를 잃은 동지의 자녀들을 양자로 삼아 키웠다. 그 중 유명한 이는 후에 총리를 지낸 리펑(李鵬)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