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기고] '카이로스'의 앞머리를 움켜쥘 수 있도록
2014-02-25 10:45
서동필 우리투자증권 100세시대연구소 연구위원
하지만, 오래 살게 되면서 뜻하지 않은 문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저 오래 살기만 바랬지, 오래 살게 됨으로써 얻게 되는 그 무수한 시간을 어떻게 살고, 무엇으로 채울지에 대한 준비가 안 돼 있는 것이다. 먹을 준비를 안했고, 먹고 나서는 무얼 할지 고민이 부족했던 것이다. 누구에게나 장수의 기회가 왔지만, 기회를 움켜쥐고 제대로 활용할 준비가 안돼 있는 셈이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회의 신 카이로스(Kairos)를 보면, 앞머리는 매우 덥수룩해서 얼굴을 가릴 정도지만 뒷머리는 머리카락 하나 없는 민머리다. 조금은 기형적인 모습이기도 한데, 기회란 그런 모습이다. 다가올 때는 덥수룩한 앞머리로 인해 기회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힘들고, 지나고 나서 기회다 싶어 잡으려고 하면 뒷머리가 없는 까닭에 잡을 수가 없다. 게다가 카이로스의 등에는 물론이고 양 발목에는 날개가 달려 있어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먹을 준비를 했으면, 이제는 먹고 나서 무얼 할지 준비해야 한다. 먹고 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얘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은퇴 이후에는 단순히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이를 소비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였다면, 근래 들어서는 나 자신을 어떻게 소비하느냐가 관심사가 되고 있다. 즉, 자아실현이라는 측면에서 그동안 잊고 있었던 혹은 누르고 있었던 본연의 자아를 발견하고 이를 실현하고자 하는 욕구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60세를 전후로 은퇴하더라도 가장 많은 사람이 사망하는 연령이 90세에 육박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30~40년이 여전히 남게 된다. 먹고 소비하는 것만으로 채우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다.
젊은 시절 자식과 가족 등 타인의 가치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면 이제는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에 딱 좋은 시기가 우리에게 주어진 셈이다. 준비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가치다. 은퇴와 동시에 자아실현하겠다고 해서 지니(램프의 요정)가 궁궐을 짓듯 하루아침에 뚝딱 이룰 수 있는 것이 자아실현이 아니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뭔지, 내가 원하는 것은 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미리부터 탐색하고 찾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필요하다면 교육도 받아야 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숨이 붙어 있으니 어찌어찌 살아질 것이다. 하지만 흐르는 강물에 배 띄운 듯 흘러가는 삶이 아니라, 키를 움켜쥐고 나아가는 삶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시간을 버틸 수 있는 물질적 준비와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정신적 준비가 병행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