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중국역사> 24일 후스 사망 등
2014-02-23 12:35
아주경제 한오종 기자 =
▲ 2월24일(월) - 1962년, 중국 신문화 운동의 선구자 후스 사망
중국 신문화 운동의 선구적 업적을 남긴 후스(胡適)가 사망했다.
1891년 생으로 향년 71세. 후진타오(胡錦濤)와 같은 안후이(安徽)성 지시(積溪)현 출신이며 원래 이름은 훙싱(洪騂, 홍성)이다. 미국 국비 유학생 선발시험에 참가할 때부터 ‘후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7세이던 1917년 베이징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진보적 성향의 <신청년>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며 백화문(구어체) 글쓰기를 주장하는 등 당시 신문화 운동의 저명인사가 되었다.
또한 실용주의에 입각해 문헌 등을 통해서 정확히 확인된 사실만을 인정했고, 통상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들은 전혀 수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연구방법에 대해 ‘대담하게 가설을 세우되, 세심하게 구증한다(大膽假設小心求證)’, ‘믿어서 틀리느니, 의심해서 틀리겠다’라고 밝히며 이를 끝까지 견지했다.
국민당 정권 아래에서 1938년 주미대사로 임용되고, 1946년 베이징 대학 총장을 지냈다. 1948년 미국으로 떠났으며 대만에 돌아 와 중앙연구원 원장으로 있던 중 사망했다.
▲ 2월26일(수) - 1913년, 중국 최초의 여성 영화배우 출현
1913년 ‘중국영화의 아버지’ 리민웨이(黎民偉)는 영화사 인아경극사(人我鏡劇社)를 만들고 미국인 두 명(Benjamin Brasky, Van Velzer)과 상업영화를 찍기로 결정한다.
미국측에서 자금과 설비를 공급하고 인아경극사에서는 장소, 배우를 책임지고 화메이영화사(華美影片公司)이름으로 출품하기로 한다.
단편 <좡즈스치(莊子試妻)>가 출품 되고 리민웨이가 시나리오를 쓰는 동시에 여주인공을 맡았다. 리민웨이의 실제 아내인 앤샨샨(嚴珊珊)이 극중 여종의 역할로 중국 영화사 최초의 여배우로 이름을 남기게 된다.
▲ 3월2일(일) - 1997년, 덩샤오핑 유해, 홍콩 앞바다에 뿌려져
덩샤오핑(鄧小平)의 화장한 유해가 홍콩 앞바다에 뿌려졌다.
그는 2월19일 향년 93세로 타계했고 덩의 미망인 줘린(卓琳) 등 그의 가족들이 덩의 유해를 홍콩 앞 바다에 뿌렸다.
덩은 생전에 ‘각막을 기증하고, 유해를 해부실험용으로 기증하며, 유골을 남기지 말고, 바다에 뿌려달라(捐獻角膜, 解剖遺體, 不留骨灰, 撒入大海)’고 유언을 남겼다.
생전에 휠체어를 타고서라도 중국에 귀속된 홍콩 땅을 밟겠다던 덩샤오핑은 역사적인 홍콩 반환(7월1일)을 4개월 앞두고 유해가 되어 자신의 희망을 실현한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