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중국역사>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 사망
2014-01-05 16:54
아주경제 한오종 기자 =
▲ 1월8일(수) - 976년, 당송 8대가 소식(蘇軾) 탄생
소동파로도 유명한 소식은 쓰촨(四川) 미산현(眉山)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첨(子瞻)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며 북송시대 저명한 문학가이자, 서화가, 산문가, 시인이었다. 아버지 소순(蘇洵), 동생 소철(蘇轍) 모두 문학에 조예가 깊어 삼소(三蘇)로 불리었다.
그의 아버지 소순은 뒤에 두 아들과 함께 당송팔대가로 이름을 알리게 되지만 공직에는 인연이 없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수레의 앞 손잡이를 뜻하는 ‘식(軾)’과 바퀴 자국을 뜻하는 ‘철(轍)’로 지었다고 한다.
소식은 문학, 시, 사(詞), 미식(美食), 부(賦), 산문, 서예, 회화 등 모든 분야에서 출중한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뛰어난 천재였다.
▲ 1월8일(수) - 1976년, ‘영원한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 사망
중국에서 ‘영원한 총리’로 불리는 저우언라이(周恩來)가 향년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저우는 장쑤(江蘇)성 화이안(淮安)에서 태어난 그는 1913년 톈진(天津) 난카이(南開) 중학에서 공부한 뒤 1917년 일본에 유학했다. 1919년 귀국해 텐진 ‘5·4운동’에 참가했고 각오사(覺悟社)를 조직했다.
그는 1920~1924년 프랑스와 독일에서 유학을 하며 중국의 유학생들과 근로자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했고 유럽 중국 소년공산당(후에 유럽사회주의 청년단으로 개칭)을 창설했다. 1922년 중국 공산당에 입당하여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 유럽총지부 서기에 임명됐다.
1924년 귀국 후 황포(黃埔)군관학교의 정치부 주임, 국민혁명군제1군 정치부 주임, 중국 공산당 양광구(兩廣區)위 위원장, 상무위원 겸 군사부 부장 등을 역임했고 국공합작 기간 중에는 당이 직접 관할하는 무장역량인 예팅(葉挺) 독립부대를 창설했다.
이후 상하이, 난창을 기반으로 무장봉기, 지하활동을 전개하며 중앙 조직부장,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활약하며 국민당의 공격을 격퇴한다.
1949년 공산정권 수립 후 총리와 외교부장을 겸임했다. 1972년 2월 미국의 리처드 닉슨 대통령 방중은 저우언라이 외교의 클라이맥스였으나 그 때에 바로 암에 걸렸다.
저우언라이는 이후 사망할 때까지 문혁 4인방 세력을 견제하는 한편 문혁으로 파괴된 정부와 당 조직을 보호하여 마오 사후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다.
▲ 1월8일(수) - 1854년, 계몽사상가 ‘옌푸(嚴復)’ 탄생
중국 근대 계몽사상가, 번역가, 북경대 초대 총장을 역임한 옌푸가 태어났다. 푸젠(福建) 성 허우관(侯官 : 현재 푸저우 福州)출신으로 1876년 영국 그리니치 해군대학에서 유학을 했다. 귀국 후 톈진 북양수사(北洋水師)에서 20년간 근무했다.
청일전쟁(1984~1895년) 이후 서구 학술과 사상을 다수 번역하고 변법운동을 비롯한 청말(淸末)의 개혁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역서로는 T.H.헉슬리의 《진화와 윤리》, C.몽테스키외의 《법의 정신》, A.스미스의 《국부론》 등이 있으며, 특히 진화론은 열강침략하의 중국의 위기를 이해시키는 이론적 매개가 되었다.
그러나 의화단 사건 이후 정치적·사회적 격동은 진화론에 입각한 그의 개혁론을 미온적·점진적인 개량주의로 후퇴시켰다. 민국(民國) 성립 초기 위안스카이의 제제운동(帝制運動)을 지지하기도 하고 공자숭배를 강조하며 5·4운동에 반대하는 등 보수주의로 흘렀다.
▲ 1월11일(토) - 1943년, 미국과 영국, 중국내 치외법권 폐지 협정 체결
충칭의 국민정부는 영국, 미국이 중국영토내에서 누려왔던 치외법권 지역을 취소하는 조약을 체결했다.
주요 내용은 1901년 9월 7일 베이징(北京)에서 중국 정부(청나라 정부)가 서명한 의정서, 즉 ‘신축조약(辛醜條約)’의 취소와 이 조약이 영국과 미국에 부여한 일체 권리의 종결, 중국 정부에 상하이(上海)와 샤먼(廈門)의 공공조계 관리권의 인계, 그리고 이들 조계가 영국과 미국 정부에 부여한 일체의 권리의 종결 등이었다.
이 조약 서명은 중국 측에서는 당시 국민정부 외교부장 쑹쯔원(宋子文)이, 양국에서는 중국 주재 대사가 하였다.
이 조약의 체결로 중국은 서방의 ‘반식민국’이라는 멍에를 벗어 버렸으며 국제적 지위가 상승했다.
▲ 1월11일(토) - 1982년, 덩샤오핑 최초로 ‘일국양제(一國兩制)’ 개념 최초 언급
덩샤오핑이 미국화인협회 주석 리야오즈(李耀滋)를 만난 자리에서 일국양제의 개념을 최초로 언급했다.
“‘일국(一國)’이라는 것은 중국의 주권과 영토가 완정하고 분할되지 않으며 하나의 통일된 국가라는 것이다. 또한 국제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것은 오직 중화인민공화국뿐이다. ‘양제(兩制)’는 통일된 중화인민공화국 내부에서 대륙은 사회주의 제도를 실시하고 대만, 홍콩, 마카오는 자본주의 제도를 유지하는 것이다”고 했다.
또한 “일국양제의 기본내용은 세 가지이다. 첫째, 중국을 대표하는 것은 오직 중화인민공화국과 중앙인민정부 밖에 없다. 둘째, 두 가지 제도가 존재하며 단 주체는 사회주의 제도이다. 셋째, 일국양제 하에서 특별행정구를 설립해 고도의 자치권을 향유하도록 하는 것이다.”고 언급했다.
덩샤오핑은 같은 해 9월24일 마가렛 대처 영국 수상을 접견한 자리에서 외국정상에게는 최초로 일국양제의 개념을 설명한다.
▲ 1월12일(일) - 1875년, 청의 10대 황제 동치제(同治帝) 사망
청의 10대 황제 애신각라 · 재순(愛新覺羅 · 載淳)이 사망했다. 묘호는 목종(穆宗)이며 연호는 동치(同治)로 통상 동치제로 불린다. 1856년 생으로 천연두에 걸려 사망할 당시 나이가 19살이었다.
1861년 불과 6세 나이에 제위에 올라 생모 서태후(西太後)가 수렴청정을 했다. 정권의 실세였던 공친왕(恭親王) 혁흔(奕忻)(동치제의 숙부)은 이 기간 동안 지방각지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 염군(捻軍), 회민(回民), 그리고 묘민(苗民)의 반란을 진압해 아편전쟁과 민란으로 내우외환에 시달리던 청에 안정을 가져다준다.
특히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 좌종당(左宗棠) 등이 요직에 등용되어 정치의 실(實)을 거두어 ‘동치중흥(同治中興)’으로 불리는 안정된 치세를 이룩하였다.
또한 ‘양무운동(洋務運動)’을 통해 서양문화를 수입, 군사, 과학, 통신 등의 여러 분야에서 근대화를 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