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정로 칼럼> 포괄수가제, 의료 서비스의 질 향상을 먼저 고민해야 할 때!
2012-05-14 17:59
우리나라가 살기 좋은 나라인가를 생각해 볼 때 한 가지 내놓을 만한 것이 있다면 의사가 필요할 때 어느 지역에서나 쉽게 전문의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해외에서 살다 돌아오거나 혹은 해외에 거주하다가 잠시 입국한 사람들이 병원이나 의원에 들러 필요한 검진과 진료·처방을 받아가는 것을 흔히 볼 수 있다.
이들은 일반의도 아닌 각과의 전문의를 거의 예약도 없이 당일 내원해 그리 비싸지 않은 금액으로 진료를 받는 국내 상황을 해외에서는 상상하기 어렵다고 한다.
이만하면 진료하는 의사들도 보람과 기쁨을 느끼며 살아갈 수 있으련만 대한민국 의사들의 현실을 그렇지만도 않다.
병·의원 개설과 유지에 대한 부담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별도로 진료를 잘 할 수 있도록 의대 교육이나 자본 지원이 부족한 실정이다.
현재 우리는 민영 자본으로 통제된 가격의 공공재를 운영하는 특이한 구조의 의료 행위가 이루어지고 있다.
지난해 8월 보건복지부는 ‘건강보험 지불제도 개편 방향’을 의결해 2002년부터 시험 적용되고 있는 7개 질병군에 대한 포괄수가제를 올해 7월부터 의원과 병원으로, 내년 7월부터는 종합병원 이상 전체 의료기관까지 확대 의무 적용토록 할 계획이다.
또 향후 수백 가지 질환에 대한 실시 계획도 마련 중이다.
포괄수가제란 환자에게 제공되는 의료 서비스의 양과 질에 상관없이 질병별로 미리 정해진 진료비를 의료기관에 지급함으로써 행위별 수가제도로 인한 과잉진료를 막기 위한 취지의 제도이다.
근 10년간 제왕절개 분만과 자궁·자궁부속기 수술(산부인과), 백내장 수술(안과), 맹장염·치질 수술과 서혜·대퇴부 탈장 수술(일반외과), 편도·아데노이드 수술(이비인후과) 등 빈도가 높은 외과수술에서 시행돼 왔다.
그러나 모든 제도가 이상적으로 보여도 현실적으로 적용하면 많은 약점을 노출하는 것을 볼 수 있듯이, 특정 제도의 실시는 전문가의 의견을 듣고 국민의 공감 아래 상황에 맞게 손질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고민해야 할 부분이 있다.
안과에서 가장 많이 시행되는 백내장 수술은 고령화 추세와 맞물려 시술 건수가 꾸준히 증가하고 이에 따라 수술 기법도 발전해 왔다.
하지만 백내장 포괄수가제에 따른 수가는 2년 전부터 꾸준히 삭감돼 오는 7월까지 약 20% 조정이 될 예정이다.
포괄수가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진료 행위나 수술에 필요한 검사 횟수 등에 상관없이 모두 진료비가 같다면 앞으로 환자에게 최소의 의료 서비스만 제공하는 의료기관이 늘어날 게 뻔하다.
더욱 우려스러운 건 현행 의료보험 수가가 이미 원가의 70% 정도 수준에 머물러 있고 이를 기초로 해서 산정되는 포괄수가 역시 최소한의 진료만을 강요하게 돼 의사의 경영 여건을 떠나 환자에게 돌아갈 의료의 질은 너무나 열악해져서 오히려 손실만 키우는 제도가 될 것이 자명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의료계 측에서는 반대 의견이 봇물처럼 쏟아지고 의료 지불 제도의 세심한 정비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다.
복지부에서는 포괄수가제가 본격적으로 도입되면 국민의 의료비 부담이 줄고 건강보험 재정 강화에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장에서 환자들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전문가의 눈으로 내다보면 의료의 질은 추락하고 환자 불만은 증가하는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할 것으로 우려된다.
더구나 우리나라는 이제 선진국 진입을 목전에 두고 의료 서비스의 질 향상을 더욱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 아닌가?
복지부는 포괄수가 수준의 적정화, 질환 중증도·치료 난이도에 따른 수가 차별화, 환자 분류 체계의 개정, 질 평가 방안에 대해 의료계와 협의하기로 약속했으나 의견 일치와 합의 과정이 거의 없이 제도 시행을 강행하려 하고 있다.
안과 역시 백내장의 중증도, 수술의 난이도 등과 상관없이 똑같은 진료비를 지불하는 포괄수가 산정의 근본적인 개선, 무엇보다 포괄수가제 작업을 총괄할 의사 전문가위원회를 상설해 미래 국가의료의 큰 방향을 정하는 정책이 졸속으로 시행되지 않도록 만반의 준비 과정이 선행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