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통현장증언><6>김덕현 박사, 인치에서 법치까지를 목격하다
2012-04-10 15:16
(베이징=조용성 특파원) 중국 베이징교민사회에서 ‘김박사’로 통하는 사람은 흔치 않다. 10만여 베이징 교민 중 김씨 성을 가진 박사는 많지만 ‘김박사’라는 애정과 존경심이 담긴 칭호는 오직 단 한명에게 해당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92년 한중수교 이전에 베이징에 들어와 불모지나 다름없는 중국 법률분야를 20여년 넘게 연구해왔으며, 이를 바탕으로 법적 곤경에 처한 무수한 교민들과 한국기업들을 도와온 만큼 그는 베이징 교민사회에서 단연 보석 같은 존재다. 현재 베이징덕현법률사무소 상임고문 및 베이징국중자문유한공사 대표를 맡고 있는 김덕현 박사의 중국과의 인연은 24년전인 1988년으로 거슬러올라간다.
1988년 한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청년 김덕현은 일본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힌 그는 당시만해도 한국유학생에 대한 대우가 탁월했던 대만으로 유학길을 틀었다. 중국과 경쟁중이었던 대만은 몇 안되는 수교국중 하나인 한국의 유학생들에게 풍부한 장학금은 물론 무료 기숙사를 제공하고 있었다. 당시 많은 학생이 미래의 중국을 쳐다보고 대만으로의 유학을 선택했다. 당시 대만에서 유학했던 학생들은 아이러니컬하게 훗날 중한관계 발전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대만대에서 법학석사 학위를 취득한 김박사는 귀국대신 중국행을 선택한다. 대만에서 함께 공부했던 김옥준 현 대명대 교수(당시 외교관)의 권유가 주효했다. 김박사의 베이징 유학코스와 절차를 알아봐 준 것도 한중수교를 앞두고 대사관 개설요원으로 베이징에 나가 있던 김옥준 교수였다. 그리고 김박사는 한중수교를 7개월여 앞둔 1992년 1월24일 톈진(天津)공항을 거쳐 베이징 땅에 발을 들였다.
그는 베이징 정법대학교에서 법제사 박사과정을 선택했다. 지도교수였던 장진반(张晋藩) 박사는 중국법학계 3대 거두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현재 덕현법률사무소의 고문으로 아직도 김박사를 돕고 있다. 정법대 박사기숙사에서의 생활은 고단했다. 그나마 그가 지냈던 외국인 기숙사는 상황이 나았다. 함께 박사과정을 밟던 중국 친구들은 급수가 잘되는 김박사의 기숙사방을 찾아와 샤워를 하고 가곤 했다. 학생식당에의 식사는 2위안에 불과했지만 학생들이 식기를 씻어서 반납해야 했다. 겨울철 찬물에 그릇을 씻기는 단연 곤욕이었다. 김 박사는 “당시 함께 공부했던 중국 친구들과 겪었던 빈곤과 고난은 훗날 소중한 추억이 됐고, 인생의 자산으로 고스란히 퇴적됐다”며 “그들은 아직도 내 친구들이며 그들의 자녀들과 내 자녀들도 친구관계”라고 소개했다. 당시 함께 정법대에서 공부했던 친구들은 지금 최고인민검찰원, 공안부, 인민법원의 요직에 진출해 있다.
그는 박사과정을 밟던 중인 1994년 국연자문이라는 회사를 창업했다. 창업계기는 우연에 가까웠다. 당시 그의 기숙사로는 중국 현지 법률상황을 모르는 한국인들이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 계약서 작성에서부터 사소한 민사법률까지 상담범위는 광범위했다. 수교초기 교민들에게 법률자문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은 김박사가 유일했다. 그러던 중 한 대기업 임원이 차라리 컨설팅사무실을 만들라고 조언해줬고 비좁은 기숙사에서 손님맞기가 불편했던 그는 창업을 했다. 이때무터 그는 전문 컨설턴트로서 맹활약을 하게 되며 무수한 한국기업과 교민들이 그의 도움을 받게 된다.
◆주요약력 ▲1959년8월, 부산 ▲1988~1992 대만대 법학석사 ▲1992~1996 베이징 정법대 박사 ▲1994년 국연자문 합자법인 설립 ▲1997년 법무법인 신세기 북경사무소 대표 ▲2007년 베이징덕현법률사무소 상임고문 및 베이징국중자문유한공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