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100대 기업과 부자들- 4> 중국 IT계의 ‘교부’ 류촨즈 前 회장
2012-03-01 08:15
중국 IT계의 교부(敎父, 최고의 스승)로도 불리는 류 전회장은 1944년 장쑤(江蘇)성 전장(鎭江)에서 태어났다. 1966년 중국인민해방군 군사전신공정학원(현 시안전자과학기술대학)을 졸업한 뒤 쓰촨(四川)성 청두(成都)에 있는 한 국방과학연구소에서 실습연구원으로 일했다.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 바람에 휩쓸려 농촌으로 하방 되어 2년여간 농장 등을 전전하다가 1970년 베이징(北京)에 상경했다. 그리고 베이징 중국과학원 산하의 컴퓨터기술연구소 외부설비연구실 연구원으로 부임, 자기회로 연구 등에 매진했다.
이후 13년간 묵묵히 과학자의 길을 걸어오면서 여러 차례 상을 받기도 했지만 그에게는 부질없는 일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문화대혁명에 쫓겨 힘이 있어도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고 하고싶은 게 있어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내 또래라면 누구나 그랬다. 그래서 속이 끓었다."
1984년, 베이징 중관춘(中關村)에 IT 관련 업체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이 지역을 중심으로 IT 붐이 일기 시작했고, 과학원 연구원 중에서도 이 곳에 회사를 차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는 판매업체들의 녹음기 수리 및 성능테스트를 통해 당시 연구원의 보너스보다 많은 돈을 부수입으로 벌어들였다.
연구인력이 외부로 유출되면서 연구소는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청마오차오(曾茂朝) 당시 소장은 이에 위기를 타개할 돌파구로 연구소 차원에서 회사를 설립하는 방안을 모색했다. 실물 경제에 도움이 되는 실용성을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상아탑에 갇혀 답답함을 느끼고 있던 류촨즈에게는 절호의 찬스였다.
시작 당시에는 한국과 타이완 등지에서 부품을 들여와 IBM, 휴렛팩커드 등의 PC를 조립생산을 담당했다. 이후 류촨즈는 '무역을 배워야만 하이테크놀로지의 산업화를 이끌 수 있다'고 판단하며 위탁판매에 뛰어들었다. 수개월 만에 수백대의 컴퓨터를 판매하면서 판매 루트 및 프로세스를 익힌 뒤에는 '컴퓨터 자체 생산'을 목표로 설정했다.
"컴퓨터 연구원인만큼 자체 생산은 어렵지 않았으나 계획경제가 걸림돌이 되었다. 회사 규모도 너무 작아서 정부 지원을 얻기에 역부족이었다."
난관에 부딪힌 류촨즈는 1998년 30만 홍콩달러를 손에쥐고 홍콩으로 향했다. 그리고 홍콩에서 다시 위탁판매 등을 하며 자금을 모았고 해외시장에 대한 이해를 넓혔다. 이 때 류촨즈는 PC 부품인 PCB에서 미래의 밝은 빛을 보고 국내로 돌아와 본격적인 생산에 착수했다. 이후 연구와 기술개발을 거듭하며 1990년 286컴퓨터 자체 생산에 성공했고 오늘 날 롄샹 발전의 초석을 다졌다.
"전략을 세운 다음에는 목표 실현을 위한 구체적 계획을 생각한다. 목표가 높으면 더 많은 계단을 쌓아야 한다. 한계단씩 오르다보면 언젠간 목표에 닿을 수 있다."
류촨즈는 자신의 경영철학인 '관리 3요소'를 핵심으로 롄샹의 발전을 이끌었다. 관리 3요소란 인재(班子), 장기적 전략 수립, 대오정비 세 가지로 요약된다. 진취적, 적극적인 인재를 양성하고 장기적인 전략을 세운 뒤 합리적이고 단계적으로 목표를 실현해간다는 뜻이다.
류 회장은 롄샹이 2005년 IBM의 PC사업부 인수 작업을 마무리진 뒤 회장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롄샹이 2008 회계연도 4분기에 적자 경영으로 위기를 맞게 되자 2009년 2월 경영 일선에 복귀했다. 류촨즈는 당시 "나는 성공했을 때에만 롄샹을 떠날 것이다. 3년 내 롄샹을 흑자전환 시킬 것"이라고 약속한 바 있다.
이후 2011년 복귀 당시 약속을 실현시킨 뒤 류촨즈는 자신의 자리를 양위안칭CEO에게 물려주고 롄샹을 떠났다. 류촨즈는 "나의 은퇴는 롄샹이 정상을 향해 순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결정"이라며 "은퇴 후 롄샹의 모회사인 롄샹홀딩스의 2014년 홍콩 증시 상장 계획을 구체화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