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될 만한 곳이 없다’ 643조 금융시장서 표류

2011-11-07 07:29

국내 부동자금이 지난 8월 이후 다시 증가세로 돌아섰다. 미국 국가신용 등급 강등과 유럽 재정위기 등의 여파로 세계 경제 전반에 걸쳐 불안감이 급격히 확산한 탓이다.

대외변수가 단기간에 해소될 조짐이 없어 외국 의존도가 높은 한국 증시에서 부동자금은 한동안 계속 늘어날 전망이다.

국내 부동산 시장도 잿빛 일색이다. 장기 침체 국면이 계속돼 부동산은 투자자산으로서 매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다. 실수요 이외에 투자 수요가 많지 않다.

부동자금은 입·출금이 자유로운 1년 미만의 은행·증권사 등의 수신 자금을 모두 합한 것을 말한다. 이 돈은 이자수익보다는 적절한 투자 대상이 나올 때까지 잠시 맡긴 대기성 자금의 성격이 짙다.

지난 8월 현재 전체 부동자금은 643조원에 달한다. 올해 정부 예산의 두 배를 넘는 액수다. 지난해 12월 국회를 통과한 2011년 정부 예산은 309조567억원이다.

◇ 정기예금 매력 잃어 단기자금 급증 시중 자금이 단기 부동화된 이유 중 하나는 정기예금 등 은행 금리가 낮아 투자 매력이 크게 떨어진 것이다.

무엇보다 물가를 반영한 은행예금의 실질 금리는 사실상 ‘마이너스’ 상태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7월 이후 넉 달째 기준금리를 연 3.25%로 묶어두고 있다.

국내에서는 세계 금융위기 이후 장기간 저금리 기조가 유지됐다. 2008년 12월 이후 연 2.25%가 꾸준히 이어지다가 작년 11월을 기점으로 격월로 인상돼 올해 3월 연 3.0%로 올라섰다. 석 달만인 6월에는 연 3.25%로 상향조정됐다.

작년 11월 이후 네 차례 인상되긴 했지만 연 3.25% 금리는 아직 낮은 수준이라는 게 시장의 대체적인 평가다.

물가를 고려하면 금리의 매력은 더 떨어진다.

소비자물가는 올해 1~7월에는 전년 같은 달보다 4%대 상승률을 지속하다가 8월에 5.3%까지 치솟았다. 하지만, 9월 4.3%로 떨어졌고 10월(3.9%) 들어 처음으로 3%대로 내려앉았다.

소비자물가가 전월보다 하락한 것은 작년 11월(-0.6%) 이후 11개월 만에 처음이다. 그동안 사실상 마이너스 금리 상태여서 은행에 자금을 장기로 넣어두는 투자자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대신에 수시입출금식예금이 8월 286조4천억원으로 전월보다 3조9천억원 늘어나는 등 시중자금의 단기 부동화 현상을 보였다.

7일 한국은행과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현금, 요구불예금, 수시입출금식 저축성예금, 머니마켓펀드(MMF), 양도성예금증서(CD), 종합자산관리계좌(CMA), 환매조건부채권(RP) 등의 단기성 자금 규모가 8월 말 현재 542조7천억원에 달했다.

여기에 6개월 미만 정기예금과 증권사 투자자예탁금까지 더하면 단기 부동자금의 규모는 643조원에 이른다.

◇증시 자금은 유럽 ‘눈치보기’게오르기오스 파판드레우 그리스 총리가 국민투표 철회 의사를 밝히면서 국내 증시에서 투자심리가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리스 채무불이행(디폴트) 우려가 크게 진정된 덕분이다.

그리스가 유럽연합(EU) 정상들이 마련한 구제금융안을 수용한다면 복잡하게 꼬인 유럽 재정위기가 조금씩 풀릴 수 있어 부동자금의 증시 유입 기대감도 커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직 본격적인 유입 신호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지난달 말 이후 코스피가 1,900선에 육박하자 국내 주식형펀드에서 대규모 환매가 이뤄졌다. 그러나 신규 유입 자금이 꾸준하게 늘아나 순유출 금액은 그리 많지 않았다. 지난달 국내 주식펀드의 순유출 액수는 627억원이다.

투자자들이 주식을 사려고 증권사에 맡겨 놓은 투자자 예탁금은 8월 19조3천억원에서 9월 18조7천억원으로 줄었다가 10월에는 20조5천억원까지 늘어났다.

신영증권 김세중 투자전략팀장은 “전체적으로 보면 부동자금이 많아졌지만, 발 빠른 개인은 펀드 투자 등의 방식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장 증시로 유턴할 부동자금이 많지는 않더라도 일부는 유입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개인 자금이 본격적으로 증시로 들어오려면 유럽 위기의 불씨가 꺼져야 한다.
강도 높은 긴축안을 둘러싸고 여전히 그리스 정국이 불안한 데다가 내년 초 유럽 각국의 국채 만기가 몰려 있어 아직은 유럽 변수가 여전한 상태다.

국내 주식시장에서 최근 외국인 매매가 뚜렷한 방향성이 없는 점도 자금흐름을 예측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다.

외국인은 9월 1조3천억원 순매도에서 10월에는 1조6천억원 순매수로 돌아섰다. 이달 들어서는 1천500억원 매도 우위를 보이고 있다.

대신증권 오승훈 연구원은 “최근 자금 동향은 위험자산이나 안전자산으로 특별히 쏠리지 않는 모습이다. 외국인에 이어 개인 자금까지 증시에 들어오려면 유럽 쪽 위험이 눈에 띄게 낮아져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대표적 위험자산 지표인 유가가 오르고, 대표적 안전자산 지표인 미국 국채 가격이 내려가야 한다. 이탈리아 국채 10년 수익률이 6% 밑으로 내려가는지도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 부동산시장 침체 탈출 요원 부동산 시장은 아직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부동산 경기 침체와 주택담보대출 억제로 투자심리가 위축됐다. 특히 수도권을 중심으로 부동산 매매가 부진하다. 전세난도 좀처럼 가라앉지 않고 있다.

부동자금이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 가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부동산써브 함영진 연구실장은 “올해 부동산 시장 자금 흐름을 보면 지방과 소형 수익형 부동산으로많이 유입됐지만, 수도권과 재건축 주택시장 유입은 많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는 당분간 이어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현대경제연구원 박덕배 연구위원은 “최근 늘어난 부동자금이 부동산 전반으로 유입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특히 서울과 수도권은 아직 공급이 많은데다 시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믿음이 약해져서 강한 매수세를 형성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유럽발 금융위기와 세계 경기 둔화 우려 등으로 금융시장이 불안한 흐름을 보이는 점도 우려 요소다. 대외 상황이 악화하면 가계대출이나 주택담보대출이 더 어려워질 수 있다.

주택 취득세 감면 조치 종료와 각종 부동산 정책의 향방도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지난 3월22일 주택 거래 활성화를 위해 올해 말까지 9억원 초과 주택을 사거나 다주택자가 되었을 때 취득세율을 4%에서 2%로 인하하고 9억원 이하 주택을 사들여 1주택자가 되면 2%에서 1%로 낮춰주기로 했다.

이 정책은 연장되지 않고 연말 종료될 예정이어서 건설업계와 부동산 전문가들은 우려감을 나타내고 있다.

함영진 실장은 “세율이 종전대로 돌아가는 것뿐이지만 투자자가 체감하기엔 세금을 더 내는 것처럼 느껴져 시장에 부정적 요인이다”라고 말했다.

한국주택협회 김동수 정책실장은 “이제 곧 총선 정국인데 분양가 상한제 폐지, 리모델링 규제 완화 등 정부의 부동산 관련 쟁점 법안들이 국회에서 통과될지 미지수다. 시장 전망을 불투명하게 하는 요소다”라고 진단했다.

/연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