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범의 생트집] '우는 놈 떡 던져주기'에 안 넘어간다

2010-10-28 12:19

괜한 시비가 아니다. 아니 괜한 시비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언론계 종사자로서, 또 신생매체의 영화 담당기자로서 현장에서 느낀 소회를 올릴 공간과 자격 정도는 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김재범의 ‘생트집’. 까닭이 있든 없든 기자의 생트집은 전적으로 독자의 판단에 맡기겠다.

며칠 전 처음 보는 번호로부터 전화가 왔다. 최근 언론의 호평을 받으며 개봉 대기 중인 영화의 감독님이었다. 얼마 전 기자가 쓴 생트집을 보신 모양이었다. 대뜸 “죄송하다”며 사과를 했다. 전화기 넘어 목소리였지만 상당히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감독님은 거듭 사과의 뜻을 전하며 기자에게 ‘초대’의 뜻을 전해왔다. “이번 주말에 시내 한 영화관에서 관객들과의 대화를 겸한 시사회가 진행됩니다. 꼭 모시고 싶습니다.”

예상치 못했던 초대. 까닭 모를 짜릿함에 가슴은 방망이질로 쿵쾅거렸다.

‘드디어 나도 영화기자로서 인정을 받았구나’ ‘매체가 아닌 나의 진가를 알아봤다’ ‘만나면 대체 무슨 말을 할까’ 등등 가슴은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그런데 즐거움도 잠시. 이상했다. “내가 왜 감독으로부터 사과 전화를 받아야 하지? 그리고 인터뷰 같은 개인적인 만남이 아닌 공개적인 시사회에 참석해 달라고? 이건 뭐 그냥 취재협조 전화잖아” 갑자기 끓어오르는 불쾌감에 치가 떨렸다.

얼마 전 기자는 해당 감독의 영화 언론시사회장에서 홍보대행사 직원들에게 받은 ‘차별 대우’에 대한 글을 썼다. 이후 몇몇 기자 선배들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최근 취재 현장, 특히 영화 취재 현장 관례에 대한 조언이었다.

각 매체의 영화 담당 기자들은 대체로 언론 시사회를 통해 주된 콘텐츠를 생산해 낸다. 생산된 콘텐츠는 리뷰와 비평, 인터뷰 등 형식과 틀에 맞는 이름을 달고 독자에게 전달된다. 문제는 이 같은 콘텐츠 생산 자격이 홍보사의 독자적인 선택으로 이뤄진다는 데 있다. 주도권은 홍보사에 있으며, 선택의 기준은 대부분 해당 언론사의 네임벨류에 따라 이뤄진다고 한다.

쉽게 말해 이름값 좀 하는 언론사가 아니면 ‘홍보사의 벽’에 막혀 배우나 감독 인터뷰 등은 꿈도 꿀 수 없다는 말이다.

이 글을 읽는 일부 독자는 ‘업계의 관행’을 지적하는 기자의 ‘밴댕이 소갈딱지’를 비난할 수도 있다. 물론 기자 역시 이러한 관행을 잘 알고 있으며, 어떤 면에선 약간의 ‘자격지심’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관행은 ‘깨지라고 있는 것’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겠다. 감독과의 통화 후 하루가 지났다. 해당 홍보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사과보다는 기자의 오해로 불거진 해프닝으로만 핸들을 돌리려 했다. 그 태도에 또 다시 울컥했다.

결국 기자는 감독이 초대한 행사에 가지 않았다. ‘우는 놈’에게 던져준 떡 하나를 덥석 받아먹기에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날 저녁 기자의 핸드폰은 조용했다.

퇴근길에 지하철 가판대에서 유명한 영화 잡지 한 권을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문제의 영화 주인공과 감독의 인터뷰 기사가 대문짝(?) 만하게 실려 있었다.

누군가 주제를 모르고 까분 ‘나부랭이의 옹졸함’을 비웃는 듯 했다. 

kimjb517@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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