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문일답] 이성태 총재, 기자단 송별 간담회

2010-03-25 11:33

   
 
 
-한은 생활 중 기억에 남는 일은.

△첫 사건은 발행 못 한 1만원권 사건이다. 1972년 발권과에 있을 때 1만원권 신권의 석굴암 본존불이 주 도안이었는데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반대운동이 일어나 결국 발행 취소됐다.

1만원권 발행 공고가 나자 박대통령의 강권 통치에 대한 민주주의 요구와 종교 문제가 결합하면서 벌떼처럼 들고일어났다. 육영수 여사가 절에 다녔고 문화재 복원 사업에 불교문화재가 많은 점 등을 근거로 정부가 기독교를 노골적으로 탄압한다고 진정서를 보내왔고 청와대, 재무부 뿐만 아니라 진정서도 한은으로 들어와 쌓였다.

당시 정보부에서 사회교란 관련된 불순세력이 없는지 파악하려고 한은에 조사를 나왔는데 박대통령이 사인한 것을 보고 그냥 돌아갔다. 조폐공사에서 4가지 색깔로 된 신권을 가져왔는데 박대통령이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박정희'라고 사인을 했으며 현재도 박물관에 있을 것이다.

-기획부장 때 비상대책위원장을 했는데.

△97년 한은법 개정 때 강당에 직원들 모아놓고 비대위 결성하는 행사를 했는데 머리띠를 한 노동조합 집행부가 현장에 참석한 장면이 TV에 나오면서 이미지 손상이 상당히 심했다.

기획부는 부서장 회의 의장(수석) 부서여서 당연직으로 비대위원장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싸움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다.

형제가 없어 싸울 사람도 없고 학교에서도 한 번도 주먹으로든 말로든 싸워본 적이 없다. 투쟁형이 아니다.

-92년 투신사 지원 서명 안 한 이유는.

△3개 부실 투신사에 대한 특융을 반대한 건 사실이긴 하지만 부풀려졌다.

지방의 한남투신 인출 문제가 직접적으로 불거지면서 비화된 사건으로, 대책 수립 과정에서 경제수석과 재무부장관, 기획예산처장관, 한은총재 등 4명이 만났는데 조순 총재가 회의 참석 전 어떻게 대응할지를 아래에 물었다.

부부장 시절인데 국가적으로 투신3사 구제키로 했다면 실무자들은 수용할 수밖에 없으며 정부의 구제가 정답이지만 여의치 않다면 한은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도 어쩔 수 없으면 하긴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좀 더 원칙적으로 하는 게 좋지 않나 싶어 국회에서 투신3사를 구제하기 위한 법을 만드는 것이 가장 좋다고 했다. 정부가 결심해 국회에서 의결했으니 중앙은행이 하는 게 당연하며 입법과정에서 무엇 때문에 문제가 됐는지도 논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하면 특별법에 융자 규모와 조건까지 박으면 한은은 집행만 하면 됐다.
차선책으로 정부가 국회의 동의를 받아오는 것이었다. 결국, 조순 총재가 적극 역할을 해서 정부가 국회 동의를 받아서 실행했다.

당시 시장금리가 13%였는데 특융을 3%에 해줬고 통화량 중심 통화정책이던 시절에 3조원을 풀고 3조원을 통안증권 발행해 흡수했으니 결국 10%를 보전해준 것이다.

한은이 국고에 납부할 돈이 3천억원 줄어드는 꼴이다. 은행을 끼워서 투신3사가 보조금을 받아간 것으로 보조금 주는 것은 중앙은행의 역할이 아니고 당연히 정부가 해야 한다.

재정활동하면 예산편성과 국회의결, 세금 거두거나 국채발행해야 하는 데 중앙은행이 하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는다.

10년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오래가지는 않았고 이자 보전해준 게 6천억~7천억원 정도 될 것이다. 보조금은 국민 돈을 써는 행위이므로 정부가 할 일이다.

-자산가격 안정 기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중앙은행은 유동성(리퀴더티) 문제에 나설 수 있지만 상환능력(솔번시) 문제는 나서는 것이 아니다. 현금 부족시 잠깐 대출해 줄 수 있지만 쓰러지는 은행을 지원하는 것은 안 된다는 것이다. 유동성 줬다가 다 회수하면 문제없지만 국고로 들어올 돈이 줄어들면 문제다.

중앙은행이 최종대부자 기능을 갖고 있지만 금융안정 기능은 간단한 게 아니다. 건전하지만 일시적으로 부실한 건지 정말로 (지급불능으로) 갈 건지 판단하기 어렵다. 소문나기 전에 빨리 들어가야 한다.

평소에 감을 잡고 있어야 기본적으로 건실한지 나쁜지 판단할 수 있다. 이는 과거에 중앙은행의 은행감독권을 요구할 때 논거 중 하나로 활용된 적 있다.

긴급자금 지원하는데 지금 구조에서는 중앙은행이 아주 고약한 처지다. 지원을 반대하였다가 실제로 망하면 책임을 다 져야 하고, 지원하게 되면 돈은 중앙은행 돈인데 실질적 결정은 다른 쪽이 하는 형태가 된다.

PF대출, 주택대출 자제 요구 등과 같이 위험이 커지는 것을 시정하는 수단도 규제 당국이 갖고 있다.

만약 원인중 하나가 금리가 너무 낮은 점이라면 금리를 올릴 수 있지만, 완전히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만 보면 기준금리 올릴 수 있는데 다른 걸 보면 금리를 올리면 안 돼 목적의 충돌이 발생한다.

중앙은행이 자산가격에 문제가 있다고 대출해주지 말 것을 은행에 닦달할 권한이 없어 기준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는데 기준금리를 올리지 말고 안정을 꾀하라고 하니 손발을 묶은 것이다.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서는 불안을 조성할 수 있는 유인이 존재하는지, 커지는 지 판단해야 하고 시정할 수 있는 수단이 있어야 한다. 감독당국 자료를 가져와서 분석할 수 있다고 하지만, 월말 보고서 실증 분석하기 위해 보완자료 달라고 하니 왜 달라고 하느냐고 한다.

중앙은행에 수단을 하나도 주지 않고 자산가치 안정과 금융안정 등 숙제는 많이 주고 있다.

작년 한은법 개정 초기에 서두를 일이 아니라고 답변했다. 나중에 6~7개월을 끈 뒤에는 이왕 시작한 것 끝이라도 내주시라고 한 것이다.

금융안정을 위해 상황판단 정확하게 할 수 있도록 정부 자료라도 보완해달라 그런 측면에서 조사권 얘기가 나온 것이다. 저쪽에서는 조사를 감독으로 보고 매우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MOU로 하자고 하는 데 매경이 MBN과 정보공유하기로 하고 매경기자가 다하면 MBN 기자는 왜 있나. 정보공유한다고 정보욕구 다 해결되지 않는다. 검찰, 경찰, 국정원이 다 있는 것은 정보 욕구가 다 채워지지 않아서이다.

한은 조사요구권 얘기했는데 상대방이 불편해했다. 문제는 이를 통해 더 얻어질 것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후임 총재와 만나나

△인수인계는 개개인 이해관계된 일이 별로 없고 대부분 경영에 관한 것이다. 실무자들이 준비해서 사인하면 되니 개인적으로 만나서 인수인계할 것이 별로 없다.

-후임 총재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별로 그럴 생각이 없다.

-혼자 결정한다면 기준금리 몇%가 적절한지

△답할 수 없고 7명으로 만든 건 이런 지배구조가 국가, 사회적으로 좋기 때문에 의논해서 하라는 것이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법대로 하자고 생각한다. 논의와 토론을 거쳐 공식적으로 결정된 것은 일단 지키자는 것이다. “열석발언권도 법에 있는데 뭐”라고 했다. 만약 법이 잘못되었다면 법을 고쳐야 한다.

- 금리가 낮지 않나

△후임자에게 부담을 주므로 상당기간(1년)동안 말할 수 없다. 2%는 기관 투자가 수준이고 서민이 대출을 받는데 조금 부담스러운 수준이어야 한다. 그 수준이 얼마인지는 말할 수 없다 .

-금통위원 임기가 늘어나야 하지 않나

△첫 째 임기가 더 길어야 한다. 둘째 한꺼번에 너무 많이 바뀌는 건 문제다.

이번에 3명 바뀌고 전에 4명 바뀌었는데 임기를 더 길게 하고 1년에 1명씩 바뀌도록 하는 것이 좋다.

-최선을 다하셨는지

△내 능력의 80만 했다. 100으로 끌어올리면 항상 문제가 생긴다.  자기 힘들고 주변에 민폐를 끼치게 된다. 욕심을 키우지 않고 능력을 키워서 80만 해야 한다.

◆ 한은 이성태 총재 프로필

▷ 이성태(李成太)
- 1945년 6월 20일 生 (경상남도 통영)

▷ 학력

- 1964년 부산상고졸
- 1968년 서울대 상대 경영학과졸(수석 입학 및 수석 졸업)
- 1988년 미국 일리노이대 대학원 경제학과졸

▷ 경력
- 1968년 한국은행 입행 조사제1부 근무
- 1975년 자금부 조사역
- 1977년 한국은행 자금부 통화관리과·금융기획과 과장대리

- 1978년 서독사무소 조사역
- 1981년 자금부 금융기획과장
- 1983년 조사제1부 해외조사과·국제수지과·일반경제과장
- 1986년 조사제1부 차장
- 1987년 인사부 차장
- 1989년 부산지점 부지점장
- 1991년 자금부 부부장
- 1992년 자금부 수석부부장
- 1993년 인사부 조사역
- 1993년 자금부 부부장(1급)
- 1994년 창원지점장
- 1995년 홍보부장
- 1996년 관리부장
- 1997년 기획부장
- 1998년 조사국장
- 2000년 조사담당 부총재보
- 2003년 부총재
- 2004년 금융통화위원회 위원
- 2006년 총재 및 금융통화위원회 의장

▷ 상훈
- 2006년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인 100명'선정
- 2010년 서울대 '빛내자상'

아주경제 김유경 기자 ykkim@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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