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 '황영기 병풍' 뒤의 풍경들

2009-09-13 16:31

지난해 9월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의 파산이 불러온 금융위기는 정보기술(IT)업계에 적잖은 타격을 줬다. 기업들이 IT 투자예산 집행을 보류하거나 규모를 대폭 줄였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소프트웨어 메이커인 마이크로소프트(MS)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감원을 포함한 구조조정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

우리 기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IT업계의 분위기를 주도하는 금융권이 소극적인 경영에 나선 데 따른 영향이 컸다. 기업들은 잇따라 마케팅 및 홍보비용 감축 등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다.

그러나 한국 IT산업은 이내 뒷심을 발휘했다.

반도체 기업들은 '치킨게임'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령했고 가전업체들은 세계 디지털 가전시장을 휩쓸고 있다.


고공행진한 원·달러 환율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닷컴 버블 붕괴와 외환위기에 따른 학습효과 덕이 컸다. IT업계가 쌓아온 자생력이다.

실제로 한국 IT산업 경쟁력은 자수성가의 산물이다.

정부는 1990년대 들어 IT산업 육성에 공을 들였지만 결과는 벤처 몰락으로 나타났다. 선무당이 사람 잡은 셈이다.

벤처신화의 몰락과 외환위기는 IT기업들에 자생력을 요구했다.


기업들은 상시적인 구조조정 체제 아래 기술 개발과 새로운 마케팅 전략 수립에 역량을 집중했다. 업계에서는 이번 위기가 몰고 온 충격이 외환위기 때만 못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반면 금융업계는 리먼 몰락으로 패닉상태에 빠져있다.

금융업계가 받은 충격은 동북아시아 금융허브를 지향해 온 정부의 호언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물론 외환위기 당시보단 체력이 나아졌지만.

한국 IT산업 경쟁력이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는 사이 금융산업 경쟁력은 추락일로다.

최근 세계경제포럼(WEF)이 발표한 국제경쟁력 평가에서 한국의 금융시장 성숙도는 지난해 37위에서 58위로 21계단 곤두박질했다.

이웃나라 일본(40위)에 크게 뒤졌을 뿐 아니라 동북아 금융허브를 놓고 경쟁하는 홍콩(1위)이나 싱가포르(2위)와는 비교 자체가 코미디다. 대만 역시 54위로 우리나라보다 한 수 위로 평가됐다.

영국 런던시가 지난 3월 낸 '글로벌파이낸셜센터인덱스(GFCI)'에서도 서울은 전 세계 62개 도시 가운데 53위에 머물렀다.

지난해 9월 이후 순위가 5계단 밀렸다. 아시아지역 도시 중에는 꼴찌다.

반면 싱가포르와 홍콩은 런던과 뉴욕에 이어 3위와 4위를 각각 차지했다. 도쿄(15위)와 상하이(35위) 타이페이(41위) 베이징(51위)도 우리보다 후한 점수를 받았다.

한국의 금융산업 경쟁력을 갉아먹는 요인은 금융당국의 일관성없는 규제다. 금융권의 핫이슈로 떠오른 황영기 KB금융지주 회장 중징계는 대표적 사례다.

황 회장은 우리금융지주 회장 재직 시절 파생금융상품 투자와 관련한 손실로 최근 금융감독당국으로부터 '직무정지 상당'의 중징계를 받았다. 전례 없는 징계인 만큼 뒷말도 무성하다.

리먼을 나락으로 몰고 간 요인 가운데 하나가 무모한 파생상품 투자였다. 이런 측면에서 무리한 투자에 대해 책임을 묻는 것은 수긍한다.

하지만 이번 황 회장에 대한 중징계는 여러 측면에서 개운찮은 뒷맛을 남겼다.

유례없는 중징계도 그렇고, 당국이 징계를 내리는 과정에서 보여준 치밀하고 일사분란함, 그리고 책임을 회피하는 금융당국의 비겁함 등등. 

황 회장으로서는 "왜 나만 그러느냐"고 항변할 만하다.

그도 그럴 것이 황 회장이 공격적인 대출과 파생상품 투자에 나선 시기는 정부가 '은행 대형화'를 강조했던 때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이 수장으로 있던 금융감독당국도 규제를 철폐하겠다며 은행권의 '몸집 불리기'를 응원했다. 당시 기준으론 황 회장만한 우등생이 없었다.

이처럼 황영기 사태는 정부와 금융감독당국, 업계의 밀월관계가 빚어낸 '부실금융종합세트'다. 앞서 언급했듯 우리나라의 금융산업 경쟁력은 세계시장은 물론 아시아 시장에서 조차 마이너리거다.

옆나라 일본과 중국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글로벌 금융강국으로 도약하는 기회로 삼아 적극적인 투자를 하고 있다.

정부 정책에 감독권이 종속되고 그런 감독당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현재같은 상황이 계속된다면 국내 금융산업의 발전은 요원하다.

IT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데는 당시 관료들이 IT산업에 대해 무식했기 때문이다. 공무원의 무간섭이 글로벌 경쟁력을 만든 셈이니 웃어야 할지 모르겠다.

금융당국은 일관성없는 선무당 정책으로 금융산업을 뒷걸음지게 할 바엔 차라리 손을 떼는게 낫다. 황영기 사태는 글로벌 금융위기 1년을 맞는 국내 금융권에서 겪은 가장 큰 홍역이다.

이번 홍역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더 중요하다. 만약 금융당국이 황영기 사태를 승자처럼 의기양양하면서 은행권 '군기잡기'에만 혈안이 된다면 국내 금융산업의 미래는 없다.

금융당국은 '황영기 병풍' 뒤에서 당당하게 나와 후폭풍에 휘말린 은행권을 수습해야 한다. '황영기 사태'가 가까스로 금융위기에서 벗어나고 있는 국내 금융산업에 악영향을 미쳐선 안된다. 

아주경제= 윤경용 기자 consrab@aj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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