盧전대통령 서거, 노무현과 광주의 '끈끈한' 인연
2009-05-24 10:45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로 그의 도전을 '무모한 도전'에서 '위대한 도전'으로 바꾼 노풍(盧風)의 진원 광주와 끈끈한 인연도 매듭을 짓게 됐다.
정치인 노무현을 광주시민에게 각인시킨 계기는 그를 '전국구 스타'로 만든 1988년 5공 청문회였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진압한 5공 주역들에 대한 송곳 질문으로 시민의 지지를 얻기 시작했다.
후보 경선에 나설 때만 해도 무모한 도전이라는 시선을 받던 노 전 대통령은 광주경선에서 1위를 차지하면서 일어난 바람으로 이인제 대세론을 함몰시켰으며 여세를 몰아 대통령에 당선됐다.
'노풍'을 잉태한 광주였지만 취임 초 큰 위기의 빌미를 제공한 곳도 바로 광주였다.
노 전 대통령은 3일 뒤 청와대에서 강신석 목사 등 5.18 관계자를 만나 `대통령 노무현'의 성격을 규정하는, 유명한 발언으로 자신의 위기감을 드러냈다.
그는 한총련 시위 등 각종 집단행동을 빗대 "전부 힘으로 하려고 하니 대통령이 다 양보할 수도 없고, 이러다 대통령을 못 해먹겠다는 생각이, 위기감이 든다"고 말했다.
노 전 대통령은 또 한 번 설화(舌禍)로 호남 지역민의 오해와 상처를 낳았다.
같은 해 9월 열린 광주.전남 지역 신문사 편집국장과 간담회에서 그가 "호남 사람들이 내가 좋아서가 아니라 이회창 후보가 싫어서 나를 뽑았다"고 발언했다는 주장이 나와서였다.
노 전 대통령은 보름여 지나 가진 청와대 출입기자와 간담회에서 "악의적인 왜곡"이라며 "대통령에게 100점을 요구하지 마라.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대통령은 선택된 사람이지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호남에서 대통령에 대해 너무 높은 요구를 하지 말고, 그래도 노무현이가 낫다는 수준으로 생각해 달라는 말을 하는 과정에서 들어간 얘기"라고 반박했다.
노 전 대통령은 대북송금 특검이 DJ정부 핵심 3인방인 박지원 의원, 이기호 전 청와대 경제수석, 임동원 전 국정원장을 조사하는 등 DJ에게 시련을 안기게 되자 호남 지지율 하락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수사기간을 연장하는 대북송금 새 특검법에 대해서는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처럼 지역의 지지도가 오르락 내리락 하는 동안에도 그가 광주.전남 지역의 비전을 마련하려 내내 고민한 흔적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광주 아시아문화중심도시, 전남 서남해안개발사업 등 지역의 낙후성을 극복할 대안을 찾았고 임기중 특별법 제정과 착공에도 힘써 안정적 기반을 다지려 했다.
특히 매년 5.18 기념식 등 주요 행사마다 어김없이 광주.전남을 방문해 남다른 애정을 보였다.
지역민들은 노 전 대통령이 도덕성에 상처를 입고 서거했지만 그가 민주화과정에서 보여준 의식과 대통령 재임 전후 광주.전남에 쏟은 애정의 의미를 퇴색시켜서는 안된다는 데 입을 모았다.
광주지역의 한 인사는 "호남의 요구와 기대에 일부 부응하지 못한 적도 있지만 100점 대통령이 못된 데는 그의 말처럼 지역의 기대가 너무 컸던 탓도 있다"며 "노 전 대통령이 수십년간 호남이 받아온 지역차별을 극복하고 균형발전을 이루려고 들인 공은 역사적으로 온당히 평가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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