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문의 ‘한글 추억’

2008-10-08 18:14

   
 
 
 한 나라의 문화척도를 가늠하는 것은 바로 그 민족 고유의 문자 사용여부에 달려 있다.

유교적 이데올로기와 한자를 중시하던 봉건의 특수층에 의해 언문으로 밀려났던 한글이 한성순보의 복간 형식으로 나온 한성주보(1886년 1월25일)가 국한문을 혼용, 한글쓰기의 가능성을 보여준 이후 순수 민간신문으로 츨범한 독립신문이 순국문만을 사용, 본격적인 한글시대를 열었다. 
 
주시경(周時經)선생은 독립신문에서 한글의 우수성을 밝히길 “조선글자가 페니키아(phoenicia, 셈족의 일파로 기원전 3000년경부터 지중해 동쪽에 건설된 도시국가로 이들의 문자는 22자의 자음자로 이뤄지며 오늘날 알파벳의 모체로 알려짐)에서 만든 글자보다 더 유조하고 규모가 있게 된 것은 자.모음을 아주 합하여 만들었고 단지 받침만 때에 따라 넣고 아니 넣고를 음의 돌아가는대로 쓰나니 페니키아 글자 모양으로 자.모음을 옳게 쓰려는 수고가 없고 또 글자의 자.모음을 합하여 만든 것이 격식과 문리가 더 있어 배우기가 더욱 쉬우니 우리 생각에는 조선글자가 세계에서 제일 좋고 학문이 있는 글자로 여겨지노라.....”고 한글의 우수성을 강조한 이후 2년여동안에 출현한 신문은 모두 순한글만을 사용하였으나 황성신문(皇城新聞)이 국한문을 병용하면서 한글은 뒤안길로 물러나게 되었다. 
 
50년대 후반 호남신문에 이어 60년대 중반 어린이신문을 중심으로 한글만 쓰기가 시행되고 일부 신문에서 간헐적으로 한글 표기를 시도하였으며 신문들이 최소한 한글날만은 문화 내지 체육면 지면에 한글을 사용하는 성의를 보였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한 예로 수영 유망주 趙眞娥선수를 한글 ‘조진아’로 표기하자 어감상 읽기에 좋지않다는 지적이 있어 다음 판에 다시 한자로 환원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하였다. 
 
1985년 한 스포츠 신문이 전면 가로쓰기로 창간하면서 한글만 쓰기를 엉겁결에 시행하였으며 한글을 사용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었지만 체계적으로 한글연구가 이뤄지거나 일정한 원칙이 수립되지않은 상태에서 한글전용 신문이 발간된 것이다.


필자는 가로신문을 주도하는 과정에서 잦은 시행착오가 발생하자 즉흥적으로 제시한 원칙이 1,한글만 쓰기를 원칙으로 한다. 2,이름 표기는 한자를 사용하되 괄호안에 한글을 병기한다. 3,여러 지명이 병렬될 경우 중간의 한 개 지명을 한자로 사용하여 구분한다. 4,띄어쓰기를 철저히 한다.등 기준을 세워 그야말로 신문에서 첫 한글사용이 이뤄진 것이다. 
 
이제 한글쓰기가 나름대로 정착되어 가는 시점에서 인터넷이 일반화되어 맞춤법이나 띄어쓰기가 완전히 무시된채 줄여쓰기. 이어쓰기. 비툴어쓰기 등이 횡행, 방가(반가워요). 추카(축하), 즐팅(즐거운 채팅). 샘(선생님), 함(합니다), 오방하군(오만 방자하군), 해서(했어), 무쟈게(무지하게), 열씨미(열심히), 근디(그런대), ㅎ ㅎ(하하), ㅋ ㅋ (크크) 등 무수한 언어유희가 난무, 마치 국어가 난타 당하고 있는 느낌이며 이와같은 현상이 신문에 그대로 전이되어 ‘짜릿한 걸(girl)’ ‘夜한 밤’ ‘아 색(色)기가’ 등 아무 의식없이 확산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신문의 주요 기능 중에는 계도성이 한 축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청소년들의 교육적 차원에서 악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사회 통념상에도 지적수준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한글날을 맞아 이러한 현상이 끝내는 신문의 품격을 떨어뜨리고 독자들이 외면하는 큰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바른 표현. 바른 문장으로 신문의 퀄리티를 높이는데 동참할 것을 촉구한다.

김 지 용

편집고문 겸 뉴스룸본부장

동국대 겸임교수(신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