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싣는 순서]
①'경영 10년' 뚜렷한 비전 부재··· 과감한 JY식 결단이 필요하다
②비전 부재 후폭풍··· 흔들리는 삼성 '초격차'
③커지는 노조 리스크, 강성노조 제 살 갉아먹기 경계
⑤글로벌 네트워크 광폭 행보, 빅테크로 도약 원동력 삼아야
선대회장의 '신경영 선언' 이후 절치부심한 삼성전자는 2010년대 중반에 들어 반도체, 스마트폰, TV 등 20여 개가 넘는 품목에서 세계 1위를 하는 글로벌 1등 기업이 됐다. D램과 낸드 플래시는 치킨게임에서 승리하며 도시바·엘피다 등 일본 반도체 기업을 파산시켰고, 스마트폰은 본고장인 미국에서조차 애플 판매량을 넘어서기도 했다. TV·디스플레이에선 중국 기업의 추격이 거셌지만 빠르게 고부가가치 상품인 OLED(유기발광다이오드)로 주력상품을 바꾸며 판을 뒤집었다.
하지만 1등 기업 삼성전자를 만들었던 원동력인 '초격차'가 이제 흔들리고 있다. 차세대 D램인 인공지능(AI) 메모리 시장에선 SK하이닉스와 기술 경쟁에서 밀렸고, 파운드리는 TSMC와 점유율 격차가 50% 가까이 벌어졌다. 모바일은 프리미엄 제품에 주력하는 애플에 판매량을 추월 당하기도 했고, TV·디스플레이는 중국 기업이 LCD 시장 장악력을 바탕으로 OLED 시장 영향력을 확대하며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삼성의 위기가 시작됐다고 전문가들이 진단하는 이유다. 삼성그룹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이재용 회장의 명확한 새 비전이 없다면 그동안 지켜온 '초격차'가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애니콜 15만대 불태웠던 '초격차'의 꿈 ··· 이대로 멀어지나
삼성전자는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빅테크'였다. 빅테크란 첨단 기술로 시장을 이끄는 글로벌 최상위 기업을 말한다. 삼성전자보다 위에 있는 IT 기업은 3대 빅테크인 마이크로소프트·애플·구글뿐이었다. 미국의 주요 IT·경제매체는 3대 빅테크와 함께 삼성전자 소식만을 다루는 코너를 잇달아 신설했다. 삼성전자 시가총액과 자산규모는 신경영을 선언한 1993년과 비교해 10배 넘게 커졌다. 국내 2위부터 10위까지 기업 시가총액을 모두 합쳐도 여기에 미치지 못했다.
이러한 글로벌 기업 삼성전자를 만든 핵심 비전이 초격차다. 초격차의 핵심은 막대한 선행 투자로 경쟁자와 기술·생산능력 격차를 상시 유지하는 데 있다. 경쟁자가 박리다매 등으로 점유율 싸움을 걸어오면 같은 가격에 기술적으로 더 뛰어난 제품을 시장에 더 많이 투입해서 격차를 벌렸다.
하지만 이제 초격차는 없다. 1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삼성전자는 주력사업인 반도체뿐만 아니라 스마트폰·TV 등에서도 더는 1등 기업이라고 할 수 없게 됐다.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엔비디아에 AI칩의 핵심 부품인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공급하는 경쟁에서 SK하이닉스에게 밀린 것이다. 2018년 반도체 슈퍼사이클(대호황)이 왔을 때 삼성전자는 D램 생산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 연구개발 라인조차 생산라인으로 돌렸고 시장성 없어 보이는 HBM 연구개발팀을 해체했다. 반면 SK하이닉스는 HBM 연구개발을 꾸준히 지속했고 그 결과가 HBM3(4세대)와 HBM3E(5세대) D램 엔비디아 조기 공급이라는 성과로 나타났다. 경쟁사와 기술 격차를 꾸준히 유지하는 초격차 전략이 유효했다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평가다.
최근에는 반도체뿐만 아니라 모바일(DX·디바이스경험)에서도 구설수가 나온다. 애플 및 중국 제조사 등과 무선 이어폰 점유율 경쟁에서 앞서기 위한 야심작이었던 '갤럭시 버즈3 프로'가 초기불량 논란에 휩싸인 것이다. 생산라인을 교체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품질 검수를 하지 않아서 생긴 일로 풀이된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학 교수는 "이건희 선대회장은 1995년 애니콜 15만대를 불태우며 불량품과 전쟁을 선언했다"며 "하지만 (갤럭시 버즈3 프로 초기 불량을 보면) 지금 삼성전자에서는 그때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평가했다. 2016년 갤럭시노트7 리콜 사태 이후 애플과 벌어진 기술 격차를 AI폰으로 좁히고 있는 현 상황에 찬물을 뿌릴 수 있다는 우려마저 나온다.
초격차 대신할 미래 비전 필요...JY가 직접 발표해야
초격차가 사라진 자리에는 빅테크 도약에 실패한 삼성전자가 남았다. 글로벌 회계법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지난해 글로벌 시가총액 100대 기업에서 22위를 기록했다. 순수 반도체 기업 순위만 따져봐도 엔비디아, TSMC뿐만 아니라 브로드컴에도 밀렸다. 브로드컴은 빅테크의 AI칩을 대신 설계하며 SK하이닉스와 함께 대표적인 생성 AI 수혜주로 떠오른 기업이다.
이에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이재용 회장이 직접 초격차를 대신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는 석학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차상균 서울대 데이터사이언스대학원 초대원장(특임교수)은 기고문을 통해 "기업은 생물이고 새로운 비전을 만들어 끊임없이 변해야 한다"며 "과거 삼성전자 성공 매뉴얼인 초격차는 이제 시야를 가리는 매뉴얼일 뿐"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HBM D램을 하나의 패키지로 통합한 엔비디아 슈퍼칩 시대에 과거 전략이 먹힐 수 없다"며 "엔비디아와 TSMC가 오랫동안 협력해 구현한 슈퍼칩 플랫폼에서 TSMC 경쟁사인 삼성전자가 얼마나 혁신성을 발휘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차 교수의 글은 글로벌 1등 기업 간 '초연합' 시대에 삼성전자가 홀로 이들과 맞서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삼성전자는 아직도 대단한 기업이다. 모든 분야에서 1등을 하던 과거만은 못하지만 상당수 사업에서 1등을 하거나 1등과 경쟁하는 2등 기업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빅테크와 빅테크가 함께하는 1등 기업 연합과 홀로 경쟁하기엔 힘이 부친다. 당장 내년부터 본격화될 HBM4(6세대) D램 경쟁에선 SK하이닉스-TSMC 연합과 겨뤄야 한다. 두 회사 뒤에는 엔비디아도 있다.
명확한 비전이 1등 반도체 기업 만든다
이재용 회장이 회장직에 오른 후 적극적으로 해외 순방에 나서며 애플·엔비디아·메타·테슬라·퀄컴 최고경영자(CEO)를 만나 글로벌 파트너십을 강조하는 이유도 이러한 초연합 시대에 삼성전자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행보다. 전문가와 석학들은 이제 이재용 회장이 행보를 토대로 자신의 경영 비전을 하나의 단어나 개념으로 축약하길 기대하고 있다. 삼성전자 임직원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감화시킬 비전이다.
실제로 한 시대를 풍미한 CEO들은 모두 자신만의 명확한 경영 비전이 있었다. 특히 반도체 업계에선 이러한 경영 비전이 회사 핵심 경쟁력으로 직결됐다. 지난 반세기 동안 세계 최대 반도체 기업으로 군림한 인텔의 '무어의 법칙'이 대표적이다. 반도체 집적도는 18~24개월마다 두 배씩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은 사실 공인받은 이론 같은 게 아니다. 하지만 인텔은 창업주 고든 무어가 주장한 이 법칙은 절대적이라며 기술 혁신을 지속, 무어의 법칙을 직접 현실화하며 반도체 산업을 선도했다. 황창규 전 삼성전자 사장도 무어의 법칙을 벤치마킹해 메모리반도체 집적도가 1년에 두 배씩 늘어난다는 '황의 법칙'을 발표하며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을 반석 위에 올렸다. 최근 인텔의 위기도 무어의 법칙을 더는 지키지 못해 생긴 일이라는 게 중론이다.
최근에는 무어의 법칙은 한물갔다며 대신 자신의 이론을 강조하는 반도체 업계 리더가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주 겸 CEO다. 그는 AI로 인해 중앙처리장치(CPU) 시대가 가고 그래픽처리장치(GPU)의 시대가 왔다고 말한다. GPU는 CPU에 버금가는 반도체라는 의미에서, 인텔을 넘어서겠다는 뜻을 담아 황 CEO가 25년 전 직접 만든 단어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도 부정 못할 'GPU의 시대'다.
황 CEO는 엔비디아 창업 후 30여 년 동안 1등 AI 기업이 된다는 자신의 비전을 현실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마찬가지로 삼성전자가 1등 AI 메모리 기업이 되려면 이재용 회장과 반도체 경영진이 직접 초격차를 대신할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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