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종 칼럼] 이승만의 토지개혁과 한국의 산업화

2024-03-06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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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종 숙명여자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이병종 숙명여자대학교 국제관계대학원 교수]



이승만 대통령의 전기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건국 전쟁’이 개봉 몇 주 만에 100만명 이상이 관람하며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다. 이 대통령에 관해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잘못 알려진 점들을 조명해서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일반인이 잘 몰랐던 내용은 3·15 부정 선거가 이 대통령의 당선이 아니라 이기붕 부통령의 당선이 목적이었다는 점(상대방 민주당 조병옥 대통령 후보는 선거 전 이미 사망), 정부 수립을 위한 첫 선거부터 여성에게 투표권을 부여한 점(프랑스나 스위스보다 앞서), 그리고 과감한 농지 개혁을 통해 농민의 80%에 달하는 소작농들에게 토지를 분배한 점을 들을 수 있다. 특히 토지 개혁은 한국의 지주 자본을 산업 자본으로 변환시켜 경제를 발전시키는 기틀이 되었다고 영화는 평가한다.
그러나 이 토지 개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영화에서 찾아 볼 수 없다. 이를 단행할 당시의 배경이나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한국 산업화에 기여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없다. 또한 이 개혁이 처음에는 이 대통령이 아니라 광복 후 미군정이 먼저 주도했다는 점도 간과된다. 사실 한국 경제와 사회를 획기적으로 바꾼 이 토지 개혁은 당시 공산 진영과 경쟁하면서 자본주의를 지키기 위해 미국 국무부가 애초부터 염두에 둔 조치였다.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이 토지 몰수 및 분배를 통해 소작 농민들의 지지를 얻고 결국 국민당에 승리한 점이 이를 잘 보여준다.

한반도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다. 분단 후 북한은 재빠르게 토지의 무상몰수 및 무상분배를 통해 지주 계층을 궤멸시키고 자작농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경작권이 있을 뿐 소유권은 국가에 있는 불완전한 제도였다. 반면 남한에서는 처음부터 사유재산권을 인정한 개혁을 시행했다. 먼저 1948년 미군정은 일제 귀속 토지를 일반에 분배했다. 국가가 이를 인수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미군정은 지주 계층을 견제하고 국가 권력의 집중을 막기 위해 그대로 진행했다.

미국식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해서 탄생한 이승만 정부였지만 사회주의적인 요소가 강한 농지 개혁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당시 국민의 71%가 농민이었는데 이 중 80%에 달하는 소작농은 산출량의 절반 이상을 소작료로 지주에게 지불했다. 대부분의 소작농 한 가족이 쌀 네 가마로 한 해를 버티는 비참한 형국이었다. 결국 1950년 유상 몰수, 유상 분배를 원칙으로 한 대대적인 농지 개혁을 단행한다. 즉 지주는 몰수된 토지에 대해 연평균 생산량의 150%에 달하는 가치를 지가 증권으로 받는다. 대신 농지를 부여받은 농민은 이를 5년에 걸쳐 분할 상환한다.

이를 통해 80%였던 소작농은 20%로 감소하고 자작농 비율이 80%로 역전되는 획기적인 결과가 초래된다. 이 토지 개혁이 발표되자마자 한국 전쟁이 터지지만 농민들은 자기 땅을 이미 약속받은 터라 이를 지키기 위해 쉽게 공산주의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다. 남침하면 남쪽 농민들 모두가 쌍수를 들고 자신들을 환영할 것이라는 북한의 계산이 틀리고 마는 것이다.

토지 개혁을 통한 또 다른 결과는 산업 자본의 탄생이었다. 지주들은 지가 증권을 보상받았으나 전쟁 통에 인플레이션이 치솟고 그 결과 증권의 가치는 폭락한다. 많은 지주들은 생활비를 조달하기 위해 이 증권을 저가에 판매했으나 반면에 이를 지속적으로 매입한 지주들은 나중에 제값을 받고 현금을 보상받아 엄청난 자본을 축적하게 된다. 이것이 결국 산업 자본으로 바뀌어 초기 재벌 그룹의 탄생을 야기한다. 두산그룹 모태인 박두병의 소화기린 맥주(OB 맥주), SK그룹 모태인 최종건의 선경직물, 한화그룹 모태인 김종회의 조선화약공판(한국화약) 등이 그것이다.

수천 년 이어온 지주 자본이 산업 자본으로 바뀌자 한국 경제는 자본주의 체제를 갖추고 그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한다. 사실 전문가들은 비슷한 시기에 같은 자본주의를 채택한 많은 남미나 아시아 국가들이 경제 발전에 실패한 이유를 거기서 찾는다. 브라질 룰라 대통령은 한 인터뷰에서 한국과 브라질의 차이가 바로 거기에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진보적인 노무현 대통령도 이 대통령의 토지 개혁이 “획기적인 정책이고 역사를 바꾼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한국의 토지 개혁은 경제 발전뿐 아니라 교육 발전에도 기여했다. 정부는 이 토지 개혁을 교육기관에는 적용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많은 지주들이 사학재단을 설립해서 교육을 확산시켰다. 결과적으로 1945년 136만명이었던 초등생 수는 1955년 287만명으로 늘었다. 사립 중학교 수는 1943년 39개에서 1953년 246개로 폭증했다. 이러한 교육의 확산은 결국 한국 경제 발전에 또 다른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이 대통령이 토지 개혁을 단행한 개인적인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정책을 거스를 처지가 아니었고 당시 지주들이 중심이 된 한민당을 견제하려던 의도도 있었다. 선거에서 농민들 표를 얻고자 하는 목적도 분명했다. 그러나 어떤 계기에서였든 이 조치가 오늘날 한국 경제를 세우는 데 주춧돌 역할을 했음을 부인할 수는 없다. 독재 등 이 대통령의 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인정해야 할 공인 것도 분명하다.



이병종 필자 주요 이력

▷연세대 언론정보학 박사 ▷AP통신 특파원 ▷뉴스위크 한국지국장 ▷서울외신기자클럽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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