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아낌없이 주는 인간' 선언

2023-04-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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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 건설노동자/작가]



내가 자란 안뒷골이라는 동네 어귀에는 솔무정이라는 곳이 있는데 큰 소나무들로 울창하다. 수백 년은 됨 직한 아름드리 나무들이 서 있는데 기골이 장대하다. 최근에 가 보았을 땐 여기저기 주사를 맞고 있는 것을 보니 나무도 나이가 들어 쇠약해진 모양이다. 하지만 이 나무를 볼 때마다 경외감이 든다. 나보다 나이도 많이 든 것도 있지만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깨우친 도인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 가지가 부러지고 찢겨도 하늘을 향해 90도로 꿋꿋하게 서 있는 모습은 사람보다 낫다는 생각이 든다.

아주 예전 내가 초등학교 시절 학교에서 늦게까지 독서를 하고 저녁 무렵 학교를 떠나 여기 솔무정에 다다르면 깜깜한 저녁이 되었다. 나무가 우거진 이곳을 지나치려면 머리가 빳빳하게 서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친구들은 나를 놀리느라 나무마다 얽힌 무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저기 소나무는 처녀가 목매달아 죽어 가끔 그 혼령이 나타난다 하고, 숲 뒤쪽 큰 버드나무는 당산나무로 가끔 금줄이 쳐 있기도 했는데 밤마다 이상한 소리를 낸다는 것이다. 큰 소나무는 일제 때 항공기유를 위해 송진을 채취한다고 나무에 상처를 내어 마치 귀신 입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느 해 가을이었을 것이다. 코스모스가 가득 피어 있던 어느 날, 그날은 정말 밤에 혼자 돌아와야 했다. 솔무정 근처까지 와서 지나갈까 말까 몇 번을 망설이다가 끝내 가지 못하고 다시 그전 동네인 거리뒷골로 돌아와 코스모스 밑에 앉아 있는데 우리 동네로 들어가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배는 고프고 밤은 깊어 가고 혼자 어쩔 줄을 몰라 할 때 동네 아이들이 몰려나와 나를 위로해 주었다.

“두수야 뭐 하니?” “응, 집에 가야 하는데 저 솔무정이 무서워서···.” “그럼 우리가 같이 가줄까? 얘들아, 같이 가자.” 그렇게 여자아이들이 나를 위해 안뒷골 첫 집까지 함께해 주었다. 아이들과 떠들면서 함께 걸어가니 시커멓게 입 벌린 그 소나무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난 그때 아이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못한 채 바로 집으로 달려갔다. 그때는 사내로서 무서움을 탄다는 소문이 날 것 같은 두려움과 부끄러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솔무정이라는 그 소나무 숲은 그렇게 내 어린 날 신화적 상상력과 두려움과 부끄러움의 상징물이 되었다.

숲과 관련된 이야기는 나만의 기억이 아니라 우리나라 건국신화에서부터 세계 각 국가의 신화에서도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환웅이 홍익인간의 이상세계를 펼치기 위해 내려와 신시(神市)를 펼친 곳도 태백산 신단수라고 나무 아래였고, 성서에 나오는 최초의 이상향이라는 에덴동산에도 생명나무가 그 중심에 있었다. 이렇게 나무에 얽힌 이야기는 세계수(世界樹·world tree)라고 해서 인류의 수많은 종교 및 신화 형성에 모티브를 제공했다.

불의 발견과 문명

영화 <아바타>에 나오는 ‘영혼의 나무’처럼 그 나무는 ‘판도라 행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우리 마음에 있었고, 인류 시원의 문화 한가운데에는 크고 오래된 나무를 신령한 것으로 여기고 이를 통해 영혼과 영혼이 그리고 자연과 교감해왔다. 그러던 인류가 문명이라는 것을 이룬 것은 불을 발견하면서부터였다. 불의 발견은 화산이나 번개 혹은 바람에 의해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도 있었겠지만 이 불을 이용하여 새로운 도구를 만들고 생활에 활용하기 시작하면서 인류의 문명은 시작되었다. 불이라는 것은 결국 나무를 태워서 열과 빛을 내는 것이다. 불의 발견은 대략 100만년 전후라고 하는데, 불은 추위를 견디게 해주고 맹수를 쫓을 수 있게 해줘 인간을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도록 도왔지만 그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불을 씀으로 해서 인류사에 드디어 요리가 시작됐다는 것이다. 인간 생물학적 측면에서 요리는 매우 중요하다. 요리는 인간이 먹을 수 있는 식재료의 범위를 넓혀 농경생활을 하게 했고, 더 많은 더 다양한 먹거리를 개발해왔다. 요리의 발달은 소화가 잘되게 만들어 인류를 더 튼튼하게 만들었고, 식사시간을 줄여 다른 활동을 위한 여분의 시간과 다른 용도로 이용 가능한 여분의 에너지를 비축하여 문명을 만들 수 있는 생각의 힘을 갖게 된 것이다.

500만년 전에 수렵과 채집을 생존 수단으로 삼았던 최초의 인류가 번성할 수 있었던 비결이 나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인류는 나무에 큰 빚을 지고 있다. 나무는 생존에 필요한 산소를 제공하고 다양한 열매와 목재를 제공하는 한편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대기오염을 개선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인류는 나무를 건축재, 연료, 종이, 섬유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했으며 대량생산이 가능한 새로운 가공 기술의 개발과 함께 나무는 산업의 중요한 자원으로 자리 잡았다.

숲은 오랫동안 인류의 생태적 근거지였다. 인류 역사 200만년 중에서 인간이 숲을 떠나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불과 1만년 전이다. 지난 1만년 동안에 농경지, 목장, 도시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베어 내었고, 지구 삼림의 3분의 1이 사라졌다. 언제부터인지 나무와 숲은 삼림 자원이라는 경제 용어로 바뀌기 시작하였다. 인류문명의 발달이란 결국 불의 적극적 사용이었다. 그만큼 숲이 사라지고 나무에서 더 효율이 좋은 석탄과 석유라는 화석연료를 사용하며 인류 문명은 발전을 더 가속화했다.

인류 문명이란 것은 결국 한 인간 혹은 한 집단의 욕망을 충족시켜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의 욕망은 과도한 에너지 소비욕이다. 사람들은 처음엔 더 많은 소비를 위해 이웃과 거래를 했고 이 거래는 국가를 넘어, 대륙을 넘어 무역이라는 거대한 거래 체계를 만들었다. 이에 성이 차지 않는 소수의 사람들은 더 많은 소비를 위해 타국을 침략해 강압에 의해 더 많은 영토와 더 많은 에너지를 얻기 위해 전쟁이라는 수단을 사용했다. 지금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러한 방식은 변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인간의 이러한 문명화 과정은 결국 자연 생태계의 파괴를 가져왔다. 셸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나무와 우리 인간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과나무와 소년은 친구 관계였으며 함께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소년은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돈이 필요했다. 나무는 나의 열매를 팔아 달라고 부탁했고 소년은 열매를 모두 가져갔다. 어른이 된 아이는 집이 필요했다. 나무는 나의 가지로 집을 지어 달라고 부탁했고 아이는 나뭇가지를 모두 가져갔다.

 아이는 어디론가 멀리 가고 싶어 배가 필요하다며 나무의 몸통을 베어갔다. 오랜 시간이 지나 노인이 되어 돌아온 아이는 여행에서 돌아와 피곤해서 쉴 곳이 필요하다고 했고, 나무는 이제 나에게 남은 건 밑동밖에 없으니 와서 그루터기에 앉으라고 말했다.


탄소중립과 신문명

인류의 과도한 욕망은 결국 지구 온난화로 폭염, 폭설, 태풍, 산불 등 이상기후 현상으로 지구를 말기 암환자로 만들었다. 높은 화석연료 비중과 제조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가진 우리나라도 최근 30년 사이에 평균온도가 1.4도 상승하며 온난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국제사회는 기후변화 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1997년 선진국에 의무를 부여하는 ‘교토의정서’ 채택에 이어 선진국과 개도국이 모두 참여하는 ‘파리협정’을 2015년 채택했고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2016년 11월 4일 협정이 발효됐다. 파리협정의 목표는 산업화 이전 대비 지구 평균온도 상승을 2도보다 훨씬 아래로 유지하고, 나아가 1.5도로 억제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구 온도가 2도 이상 상승하면 폭염, 한파 등 보통의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자연재해가 발생한다. 상승 온도를 1.5도로 제한하면 생물다양성, 건강, 생계, 식량안보, 인간 안보 및 경제성장에 대한 위험이 2도보다 대폭 감소한다. 지구 온도 상승을 1.5도 이내로 억제하기 위해서는 2050년까지 탄소 순배출량이 0인 탄소중립 사회로 전환할 필요가 있다.

탄소중립은 인간의 활동에 의한 온실가스 배출을 최대한 줄이고, 남은 온실가스는 흡수(산림 등)하고 제거해서 실질적인 배출량이 0(Zero)이 되는 개념이다. 즉 배출되는 탄소와 흡수되는 탄소량을 같게 해 탄소 ‘순배출이 0’이 되게 하는 것이다.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인 IPCC에서는 2100년까지 지구 평균온도 상승 폭을 1.5도 이내로 제한하기 위해서는 전 지구적으로 203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010년 대비 45% 감축하여야 하며, 2050년경에는 탄소중립(Net-zero)을 달성해야 한다고 제시했다. 심각하다. 무엇보다 나의 노력이 필요하다. 국가나 사회적 노력은 나의 관심 밖일 수 있다. 우선 나부터 탄소중립을 선언해야 한다. 승용차 1대를 사용한다면 이를 상쇄하기기 위해서는 소나무 17그루가 필요하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이산화탄소 발생을 의미하는 탄소발자국을 전혀 남기지 않을 방법은 없다. 다만,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방향으로 생활습관을 바꿔 나간다면 탄소발자국을 지금보다 줄여나갈 수는 있다. 한 달에 전기 사용 234㎾h, 도시가스 162㎥, 수돗물 11㎥, 쓰레기 배출량 40ℓ, 출퇴근 시 버스 이용(하루 왕복 2시간 30분, 한 달 20회 이용), 승용차 이용(월 2회, 500㎞)으로 내뿜은 이산화탄소량은 207.16㎏이다. 이렇게 배출된 이산화탄소를 흡수하려면 잣나무를 연간 801그루 심어야 한다.

이제 인간은 지구에 ‘아낌없이 주는 인간’이라는 선언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인간은 삶의 터전으로서 숲에 의지했지만 한편으로는 인간만의 문명을 이룩하기 위한 수단으로 혹은 정복의 대상으로 이용했던 공간이기도 했다. 이제 새로운 문명은 자연이나 타인을 착취해서 자신의 소비 욕망을 충족시키는 문명이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사는 공생의 문명이 되어야 한다. 몸을 거할 처소가 주는 안정감, 흥을 돋우는 즐거움, 문화적인 우수성 등 그 원천은 사실 나무에서 시작되었다. 그러고 보면 이씨인 내 조상은 아무래도 나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 같다. 李라는 글자로 보면 ‘나무 아래서 자식을 얻었다’는 뜻이 아닌가. 사람이 나무에 기대어(休) 숨을 쉬는(息) 것을 휴식이라고 한다. 이제 인류 문명은 투쟁과 정복에서 릴렉스, 쉼의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숲과 자연을 파괴하는 정복의 문명에서 나무에 다시 기대는 휴식의 문명으로 바뀌고 있다. 자연을 'Mother Nature'라고 하지 않는가. 이제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부모의 품을 떠나 세상에 나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의 비유’를 생각하며 정복과 투쟁의 문명에서 화해와 공생의 신문명으로 전환되어 가기를 바라본다.
 

[그림설명 無情花動人 “무심하게 피는 꽃, 나그네 발길 멈추게 하네” 요즘 여기저기 다투어 피는 매화, 살구, 복숭아, 배, 벚나무 꽃들로 꽃이 지천이다. 이런저런 일로 세상이 혼란스럽지만 때가 되면 전장이나 재해 지역에도 꽃을 피우는 나무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나는 때가 되면 꽃을 피우고 잎을 내고, 갈 때가 되면 꽃잎 지우고 잎도 떨궈내는 나무만 한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늘을 향해 90도로 서 있는 저 나무만 한가. 나도 나무가 되고 싶다, 생명나무가 되고 싶다./그림 이두수 작가 ]




필자 소개 - 이두수 작가는 수년 전부터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노동 현장의 삶과 애환을 그림과 글씨로 표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 전 시민단체인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8년간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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