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두수의 절차탁마] 1월, 새 희망 새 출발 …'당신이 하늘이오'

2023-01-12 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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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수 건설노동자]


1월은 내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달이다. 새해 첫 달이라 시작과 출발의 의미가 있기 때문이지만 사실 그보다는 내 생일이 들어 있는 달이기 때문이다. 정월(설날)에 대한 기억이 그리 좋지는 않다. 내 생일은 정월 초엿새인데 6일 후면 내 생일이 특별한 날이 되지 못하고 정월 제사상에 오르고 남은 음식을 상하기 전에 한데 모아 죽 끓여 먹는 날이 바로 내 생일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릴 적 교회에 다니면서 창세기를 읽으며 새 하늘 새 땅이 시작하는 날 이후 6일째 되는 날 인류 최초의 인간, 아담이 창조된 날에 나도 태어난 그 날이라니 내 생일날이 꽤 의미 있는 날이라 여겨지기는 했다. 그런 새해 정월의 의미를 생각하며 2023년 한 해를 어떻게 맞이하고 보내야 할지를 생각해 본다.
 
정월의 의미
왜 1월을 正月이라고 했을까. 중국에선 진시황의 이름이 政인데 황제의 이름을 쓸 수 없어 발음이 같은 正을 사용케 한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일본에선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의미로 正月(しょうがつ)라고 한다. 어쨌거나 새해 1월을 정월(正月)이라 하는 이유는 첫 달을 올바르게 지내야 일년을 무사하게 지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가 아닐까라고 여긴다.  묵은 해를 보내고 다시 시작되는 해의 첫 달부터  올바르게 보내고 싶은 그 마음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건 사람들 마음속에는 양심이 있어 바르게 살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이 바르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바름, 한자로는 왜 正이라고 썼을까.

퇴근하다가 건널목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한 여인의 뒷모습을 보았다. 검은 코트에 흰 백을 어깨에 메고 있었는데 그녀의 어떤 매력이 나를 멈추게 했는지는 모른다. 그녀는 분명 길을 건너려고 했다. 그녀는 일단 가던 길을 멈추고 좌우를 둘러 보았다. 길을 건너면서도 여러 번 좌우를 돌아보았다. 길을 건너간 그녀는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는 내게서 멀리 사라졌지만 여운은 길게 남았다. 건너기를 위해선 우선 가만히 멈추어야 한다. 그리고 좌우를 둘러보아야 한다. 좌우를 살핀 후에 건너기를 하는 것이다. 찰기시(察其始)라는 말이 있다. 장자에 나오는 말인데 ‘그 본바탕을 잘 살핀다’는 의미다. 장자 철학에서 이 ‘살핌’이라는 말은 매우 중요하다고 철학자 최진석 교수는 말한다. 우리가 어떤 것을 처음 대하거나 낯선 경우를 만났을 때 우선 살펴야 한다. 살피다는 의미는 ‘어떤 현상을 주의하여 관찰하거나 미루어 헤아리다’라는 의미다. 관찰하고 미루어 생각하는 이 행위가 생략된 채 판단이나 결론을 내리면 그 행위는 과정이 생략된 것이며 대략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므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먼저 이 살핌이 중요한 것인데 ‘바름’이라는 이 한자 正은 바로 그 의미를 품고 있다. 즉, 바름이라고 하는 것은 일(一)자에 이르기 전에 멈추는(止) 것이다. 정월을 맞는 우리는 사실 한 해를 어떻게 보낼까하는 연간 계획을 세우며 지낼 것이다. 어떤 이는 금연을, 어떤 이는 다이어트를 또 어떤 이는 대박을 바라며 여러 계획들을 세울 것이다. 그런 계획들이 중도에 포기함 없이 잘 진행되길 바란다. 작심삼일이 되어도 실망하지 말기 바란다. 삶이 다 그런 것이니까. 포기하지 말고 다시 세우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먼저 ‘찰기시’하라는 것이다. 일단 멈추고 살피라는 것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아름다움도 사랑도 멈추어 살펴야 볼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될 수 있으면 오랫동안 찬찬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애틋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느껴야 행동할 수 있다. 즉, 판단은 살피고 난 후의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찬찬히 살피고 생각하는 과정을 생략하여 성급한 판단을 내리려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아마 우리말 중에 가장 글로벌화 한 말이 있다면 그것은 ‘빨리빨리’가 아닐까. 생각의 과정이 생략된 오로지 행동만을 요구하는 결과지상주의 같은 말. ‘정의’ ‘공정’이란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투쟁의 칼날로 사용하며 세상의 온갖 부조리를 다 청소하겠다는 그 투쟁의 보검이 광란의 춤을 추게 한 것도 결국은 살피는 과정이 생략되었기 때문이다.
 
존재를 대하는 생각의 차이
이러한 생각을 갖게 한 것은 존재를 보는 시각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두개의 존재로 구성된다. 동양도 서양도 마찬가지다. 물리학이든 인문학이든 동일하게 존재하는 모든 것은 두 존재로 구성된다. 이와 기, 음과 양, 형상과 질료, 전자와 핵 등이 있는데 문제는 이 두 존재의 관계다. 대립물의 투쟁으로 존재한다는 유물변증법이 한 세기를 풍미하며 모든 인문학을 점령하는 듯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물리학은 두 존재가 상호 보완적 관계라고 증명해주었다. 유일하게 한반도의 식자층만이 이 두 존재가 대립 투쟁한다고 믿고 투쟁을 일상화하며 발전의 동력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자식만큼은 사랑 속에서 살기 바라며 반미를 외치면서도 자녀만큼은 미국에서 공부하길 바라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다. 공정과 정의를 내세우면서도 뒤로는 검은돈을 착복하며 권력의 중심부까지 들어갔다. 남녀간의 갈등을 조장하는 급진 페미니즘, 인내천 사상으로 상생의 도를 펴온 동학인들을 투쟁의 전사로 만들어 온 투쟁사관, 기업이 망할 때까지 투쟁을 부추기는 노사분쟁 등등.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존재를 이렇게 설명한다. 자연이나 사물현상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로 대립되는 측면들, 대립되는 힘들, 대립되는 경향들이 있다. 예컨대 전기에는 양전기와 음전기가 있고, 자석에는 북극과 남극이 있다. 계급사회에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있다. 이것은 모든 사물은 대립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립물들은 이와 같이 서로 연관되고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투쟁하며 배척한다. 긍정과 부정이 서로 배척하면서 선과 악도 서로 배척한다. 서로 연관 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배척하고 서로 투쟁하는 두 대립물들 간의 관계를 모순이라고 한다. 이 모순은 사물발전의 원천이다(뉴스프리존). 이런 시각을 우리 사회에선 진보적 시각이라 하고 이런 사고구조를 가지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진보라고 부른다. 그러나 과연 이런 시각이 역사의 진보를 이루고 사회를 발전시켰을까. 산업계에서는 노동자와 사용자로 구분하여 노동자가 진짜 주인이라며 사용자를 몰아내자고 한다. 이러한 시각은 노동계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서 나타나고 있다. 학교는 물론이고 공무원 사회, 병원, 심지어  급진 페미니즘은 전통적인 가족관계를 해체 시키려 하고 있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사회나 가정을 근본적으로 남자가 여자를 억압하고 지배하는 가부장제로 바라본다. 이들은 단지 남성의 특권을 폐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성적 구분 그 자체를 종식시키는 것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시각에 머무는 한 우리는 일상을 증오와 투쟁으로 살아야 한다.

다시 생각해 보자. 존재하는 모든 사물들은 대립적으로 존재하는가. 이와 기가 형상과 질료가 대립하며 투쟁하는 관계인가.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자체 내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존재들과의 사이에서 양성과 음성이라는 두 성질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 이에 대한 예를 들어 보면, 모든 물질의 궁극적 구성요소인 소립자들은 모두 양성 음성 또는 양성과 음성의 중화에 의한 중성 등을 띠고 있는데, 이것들이 상대적 관계를 맺어 원자를 형성한다. 그리고 이러한 원자들도 양성 또는 음성을 띠게 되는데, 이것들의 두 성이 상대적 관계를 맺음으로써 물질의 분자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물질들이 식물 또는 동물에 흡수됨으로써 그것들의 영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식물은 각각 수술과 암술에 의하여 존속하고, 또 모든 동물은 각각 수컷과 암컷에 의하여 번식 생존한다. 인간을 보더라도 남성과 여성이 이런 상대적 관계로 존재한다. 또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 외형과 내성을 갖추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는 형상과 질료로 설명한다). 그리고 그 보이는 외형은 보이지 않는 그 내성을 닮아 난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는 존재는 두 측면이 대립물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이며 상대를 필요로 한다. 즉, 상대를 필요로 한다는 것은 그 관계가 서로의 필요에 따라 잘 주고 잘 받음으로 발전할 수 있고 또 존재를 유지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의미다.
 
헤어질 결심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기를 할 때 우리는 어떤 시각으로 이 세상을 볼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사회현상을 볼 때, 역사를 해석할 때, 국제정세를 파악할 때 이런 철학의 차이가 국가정책을 만들고, 시스템을 만들고, 내 가정과 개인의 인격을 만든다. 존재하는 모든 사물이  상호모순에 의한 대립물의 투쟁관계로 역사를 보니까 사회는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누게 되고 그들은 모순 관계이니 필연적으로 싸워야 한다. 그래서 재벌, 고위공직자, 엘리트들을 모두 처단해야 할 적폐로 모는 것이다. 이렇게 적폐를 처단하고 나면 정상적인 사회가 될까. 아니다. 다시 이 안에서 모순관계는 나타나며 계급투쟁은 끝없이 계속된다.  원래 존재물의 속성이 그렇다 라는 가설로 출발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이런 철학과 헤어질 결심을 해야 한다. 냉전의 종식은 이런 유물변증법적 세계관의 종식이었고 파멸이었다. 하지만 이 땅에서만은 유일하게 살아남았고 변이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북한이라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반인권적이며 봉건독재사회를 유지시켜 주었다. 우리는 이제 상대를 소유하는 존재가 아니라 상대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존재 본래의 특성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회복탄력성(Resilience)이란 말이 있다. 인생의 바닥에서 바닥을 치고 올라올 수 있는 힘, 밑바닥까지 떨어져도 꿋꿋하게 되튀어오르는 마음의 근력을 의미한다.

유전자는 이중 즉 쌍으로 되어 있고 나선구조를 이루고 있다. 쌍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 것은 대립물이 아니라 상호 보완적 관계라는 것이다. 우리의 먼 조상들이 꿈꿔왔던 홍익인간, 접화군생, 재세이화 등의 이상이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되어 있다면 이제 우리는 증오와 분열적 가치관에서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고 하나되는 ‘당신이 하늘이오’라는 한류 본연의 정신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이런 만남의 결심이라면 얼어붙은 샛강 바닥에서 열심히 숨쉬기 하고 있을 송사리 그리고 언 땅 밑에서 찰기시하고 있을 버드나무 뿌리들을 생각하면 정월을 맞는 새 희망 새 출발의 각오로 충분하다.
 

[그녀의 뒷모습은 아름다웠다. 길을 건너기 위해 일단 멈춰야 한다. 멈춘다는 것은 숨을 고른다는 것이고 숨을 고르는 것은 여유를 갖는 것이다. 그녀는 확실히 여유가 있어 보였다. 건너기 위해선 일단 멈추고 살피라는 것 그것이 바름이고 察其始다. 신호를 기다리는 그녀는 아름다웠다... [이두수 작가 제공]




필자 소개 - 이두수(54)는 수년 전부터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자신이 직접 체험한 노동 현장의 삶과 애환을 그림과 글씨로 표현하는 작가이기도 하다. 건설 노동자로 일하기 전 시민단체인 아프리카아시아난민교육후원회(ADRF)에서 8년간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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