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이한 상상력을 가지고 소설을 쓰는 구병모 작가.
그의 소설은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불만에서 나왔다고 한다.
불만이 그의 소설에 어떤 영향을 줄까? 구병모 작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구병모 작가 [사진= 구병모 작가]
그의 소설은 자신을 둘러싼 현실의 불만에서 나왔다고 한다.
불만이 그의 소설에 어떤 영향을 줄까? 구병모 작가와 이야기를 나눴다.
구병모 작가 [사진= 구병모 작가]
A. 단지 작가 입장에서가 아니라, 현실에 불만이 없는 사람을 찾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 얘기가 처음 나온 것이 아마도, “글을 쓰기 위해 제일 먼저 필요한 게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우선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 대해 불만을 가져야 돼요.” 저는 이때 다른 분들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쉽도록 불만이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불편과 부당함이 누적된 역사에 대한 분노를 잊지 말자는 뜻에 가깝습니다.
구체적으로 작은 예시를 들어볼게요. 경장편소설 '네 이웃의 식탁'은 2018년에 발간됐는데, 만약 그 당시의 제가, 사회가 인간을 취급하는 방식(머릿수 세기, 재생산 노동력)에 대해 아무런 불만이 없고 편안하게 받아들였다면 그런 소설이 나오지 않았겠지요.(내용을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간략하게 소개하자면, 정부에서 출생률을 높이기 위해 소위 ‘정상가족’에 해당하는 집단을 계획적으로 모아 아이를 출산하고 길러내라는 공동주택을 건설한 곳에서 벌어지는 뒷목 잡는 이야기입니다.)
지금은 그때로부터 나아지기는커녕 악화일로를 걷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한 존중은 더욱 없어지고 있지요. 그런 부당함이 세상에서 없어졌으면 좋겠다든지, 언젠가는 없어질 거라든지 그런 순진한 소망은 품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학을 통해, 최소한 이것이 부당한 일이라는 사실을 단 한 사람이라도 더 알게 될 수는 있겠지요. 부당함의 즉각적인 개선은 언감생심이라고 치고, 그 이전에 이것이 부당한 줄도 모르고 산다면 그건 살아 있다고 보기 어려울 것 같아요.
Q. 잔혹하고 차가운 세상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님을 숨 쉬게 하는 구원의 존재는 뭔가요?
A.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삶의 자세와 ‘구원’의 존재 두 가지 모두에 대해 비관적인 모드를 상시 켜고 있습니다. 저의 소설을 읽고 희망과 위로를 얻었다는 디엠을 자주 받은 편인데요, 저 자신은 희망도 위로도 좋아하지 않고 그 본심이 상당히 많은 소설에 두루 나타나 있습니다. 다만 일부 히트작만큼 널리 많이 읽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 점이 잘 알려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작가는 희망도 위로도 믿지 않으면서 일부 소설에는 마음에도 없는 희망과 위로를 담았단 말이냐?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믿지 않는 거라고 해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믿지 말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는 것이고, 다음으로는 제가 아무리 차갑고 절망적인 이야기를 하더라도 그것을 읽는 분들께서 어떻게든 실낱같은 온기를 발견하여 뽑아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희망과 위로란 사실은 소설이 아니라 독자님들 각각의 마음속에 이미 있었던 게 아닐까 싶어요.
Q. 소설들을 읽으면서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작가님의 상상력의 원천이 뭔지 궁금해요. 그리고 상상이 현실이 된다는 말이 있잖아요. 작가님의 작품 속에 하루를 산다면 어떤 작품 속으로 들어가고 싶나요?
A. 그 정도의 보편적인 상상력은 원천이 어디에 따로 있다기보다는 기자님과 저를 포함하여 세상 누구나 다 갖고 있습니다. 저는 다만 그것을 망설이지 않고 밖으로 꺼내놓았을 뿐입니다. 꺼내놓는 것은 과감한 태도와, 꾸준한 훈련과, 그렇게 쌓인 스킬의 문제에 불과합니다. 제 소설 속에서 하루를 보내라고 한다면 아무 곳에도 들어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모험이나 환난은 저의 머리와 가슴에서 펼쳐지는 걸로 충분합니다.
Q. 구병모에게 소설을 쓴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요? 언제 글 쓸 맛이 나는지도 궁금해요.
A. 살아간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요? 살아갈 맛은 언제 나지요? 그것에 대해 수많은 철학자들이 분석하고 자기 나름의 대답을 내렸을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살아 있으니까 어떻게든 살아갑니다.
소설을 쓴다는 것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면 한편으로 이 모든 행위의 궁극적인 의미가 무엇이냐, 의미가 과연 있긴 있느냐 하는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이렇게 선문답 비슷하게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행위의 의미를 찾기 위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진정한 의미를 깨달을 때는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바로 그때가 아닐까?라고 말입니다.
Q. 주로 소설의 영감은 어디서 얻나요? 그리고 영감이 소설이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A. 일상생활, 신화와 설화, 꿈 등등 다양하게 여기저기서 얻기 때문에 주요 루트가 있지는 않습니다만, 예를 들어 이번에 개정판이 발간된 '위저드 베이커리'는 그림형제 메르헨에 있는 헨젤과 그레텔 이야기의 변주 같은 것이고요, '파과'는 그 창작 동기가 많이 알려진 편인데 냉장고를 청소하다가 그 안에 잊힌 채로 들어 있던 상한 복숭아를 보고 쓰게 된 거고요. 2019년작 '버드 스트라이크'는 2011년의 어느 날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날아다니는... 그거 갑자기 이름이 생각 안 나는데 그거 뭐죠? 도시에서 벽 타고 날아다니는 익스트림 스포츠 말이에요. 하여간 그런 방식으로 날아다니는 사람들을 보고 쓰게 됐어요. 어떤 경우는 발상 즉시 일사천리로 스토리가 풀려 나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오래 묵혀두었다가 여러 가지 자료 조사라든지 내러티브의 건설을 한 다음에 나오게 되지요.
Q. 작가님께서 살아가면서 되감고 싶고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이 있나요? 그리고 그 이유가 뭔가요?
A. '위저드 베이커리'에서 무언가를 되감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과거에 했던 실수라든지, 그때 그러지 말 걸, 다른 선택을 하면 좋았을 걸, 이렇게 후회와 관련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혹은 소설 속에는 따로 나오지 않았지만, 옛날 그때 그 순간이 너무 좋아서 추억을 되살리고 싶다, 기억을 간직하고 싶다,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저는 과거의 일을 되도록 떠올리지 않으려고 합니다. 살면서 후회되는 일이나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왜 없겠느냐만, 지금 그거 생각해봤자 소용없는 거 알기 때문에 생각을 안 하려고 한다는 거죠.
반면 좋은 추억이라고 해도 역시 되도록 붙들어 놓지 않습니다. 저는 지금을 사는 사람인데, 추억을 붙들고 있으면 언젠가 자기가 추억에 붙들릴 수도 있다, 즉 추억에 발목 잡혀서 지금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는 경계심을 갖고 있어서요.
예를 들어 각종 기업체 사보나 잡지 계통에서 옛 추억이나 유년기의 일화나 고마운 스승님 같은 테마로 기고문을 요청하실 때가 있는데 일절 사양하고 있습니다. 추억을 팔아서 쓰는 성격이 아니어서요.
단 한 번, 데뷔한 지 얼마 안 됐을 적에 ‘나의 청소년 시절’ 혹은 ‘나의 고등학생 시절’로 청소년들에게 보내는 산문을 써달라고 출판사에서 제안하신 적이 있어요. 저는 그때 대답했어요. “고등학생 시절에 기억하고 싶은 것 하나도 없고 다 지워버리고만 싶어서 저는 어렵습니다.” 그랬더니 출판사에서 이렇게 말했어요. “그럼 다 지워버리고 싶고 잊어버리고 싶다는 내용으로 써주세요.” 그래서 옛 기억을 선명하게 간직한 상태로 쓴 글쓰기는 그때가 처음이자 아마 마지막이었을 거예요. 그러고 보면 저는 정말 앞만 보고 살고 어떻게 보면 꽤 실용적인 성격, 다르게 보면 너무 건조한 성격인 것 같기도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