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경쟁원리 무시한 '금융 포퓰리즘'

2021-12-2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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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상공인 부담 던다" 13차례 카드수수료 인하…소비자 혜택 축소로 이어져

모든 문제 관치로 해결하려는 병폐…아르헨티나 국민들 혹독한 대가 잊었나

[전운 재테크 에디터]

미국은 2011년 직불카드 수수료를 건당 21센트로 제한하고 정산수수료율을 결제액 대비 0.05% 이하로 못 박는 내용이 담긴 ‘도드-프랭크 금융개혁법’ 개정안을 시행했다.
 
카드 발급 은행의 이익을 줄여 소비자와 가맹점의 혜택을 높이겠다는 취지였다. 금융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이었지만 전형적인 금융 포퓰리즘의 하나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결국 수익이 떨어진 은행이 고객 혜택을 축소하고 직불카드 발급을 줄이자 결국 소비자는 카드를 해지하고 시장은 위축됐다.
 
국내에서도 도드-프랭크법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금융 경쟁력이 포퓰리즘에 휘둘려 끝없이 추락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융산업의 후진성에다 정부의 일방적인 정책까지 겹치면서 총체적 난국이다.
 
가장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카드수수료다. 정부는 소상공인의 비용 부담을 덜고 양질의 일자리를 만든다는 명분으로 카드수수료 인하 방책을 꺼내들었다. 2007년부터 총 13차례나 수수료율 인하를 단행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혜택 축소로 이어졌다.
 
2018년 카드수수료율 인하 후 수익이 떨어진 카드사들은 카드 부가서비스 유지 의무 조항을 3년에서 1년으로 줄여 달라고 당국에 요청했다. 포인트·할인 등 고객에 대한 의무 서비스 기간을 줄여 수익 악화를 최소화하겠다는 취지였다.
 
결국 당시 순이익이 떨어진 카드사들은 혜택이 두둑하던 카드상품들을 무더기로 단종하면서 소비자들의 피해로 이어졌다.
 
23일 카드수수료율은 한 차례 더 인하됐다. 카드사들은 본업인 신용판매에서 수익 하락이 불보듯 뻔한 만큼 과거와 같이 소비자의 혜택을 줄이거나 이자 마진을 올려 손해를 만회할 것으로 보인다.

소상공인의 표심을 얻기 위한 정부의 포퓰리즘이 기업과 소비자 피해로 고스란히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포퓰리즘에 의한 금융산업의 경쟁력 저하는 금융혁신도시 정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영국 컨설팅그룹 지옌(Z/Yen)의 지난 9월 국제금융센터지수(GFCI)에 따르면 서울은 세계 126개 도시 중 13위에 그쳤다. 2015년 6위까지 올랐던 경쟁력은 오히려 계속 떨어지고 있다. 부산은 33위에 이름을 올렸다.

추격 상대인 홍콩, 상하이, 싱가포르 등에 한참 못 미친다. 금융위원회마저 2009년 금융 중심지로 지정된 서울·부산에 대해 "서울과 부산의 금융 인프라는 지속적으로 개선되고 있으나 GFCI는 여전히 다소 미진한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이는 우리나라가 인적·물적 인프라 집결이라는 금융허브의 속성을 거스른 탓이다. 뉴욕과 런던은 글로벌 금융사와 금융 관련 기관을 집중 배치해 비즈니스·협업·국제행사 기회를 키우고, 우수한 인재를 끌어들여 세계 1·2위 금융허브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서울에 있던 주택금융공사·예탁결제원·자산관리공사 등 수많은 금융공기업이 2014년 이후 줄줄이 부산·세종·전주 등으로 흩어졌다. 국가 균형 발전 정책이라는 명분이다.

게다가 현 정권에서는 지난 대선 당시 전라북도를 제3금융 중심지로 지정하겠다며 공약을 내세웠다. 최근 들어서는 정부가 지정을 보류하면서 서울·부산에 인프라를 더욱 집중하기로 했지만 포퓰리즘으로 인한 탁상공론을 보여준 단적인 예다.
 
산업은행과 수출입은행·기업은행 등 주요 국책은행도 정치 외풍에 휘말려 곤혹을 겪었다. 각종 선거 때마다 국책은행 본점의 지방 이전이 수면 위로 부상하면서 국책은행 내부에서는 금융 경쟁력은 차치하고 일할 분위기라도 만들어 달라는 하소연이 심심찮게 나왔다. 선거철을 앞두고 나오는 정치권의 전형적인 포퓰리즘 행보다.
 
내년 대선을 앞둔 지금, 포퓰리즘은 극에 달하고 있다. 정치판의 포퓰리즘은 늘 여야 간 상승작용이 무섭다. 선거철엔 코로나 오미크론 변이 이상의 전파력을 갖게 된다. 자영업의 코로나19 손실보상금과 관련해 “집권 후 100조원”(윤석열 캠프)을 공약하자 이재명 후보 측이 “추경으로 당장 하자”는 등 ‘묻고 더블로 가’식의 지르기 경쟁이 점입가경이다.
 
이재명 후보의 ‘기본 시리즈’는 기본 마이너스통장까지 진화했다. 전 국민에게 1~2% 저리로 1000만원씩을 빌려 주겠다는 게 골자다. 윤석열 후보는 청년층과 신혼부부 등에게 담보인정비율(LTV)을 최대 80% 완화한다고 내세우고 있다. 미친 듯이 치솟는 가계부채와 집값을 생각하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의문이다. 앞뒤 재지 않고 무조건 지르는 건 아닌지 걱정스럽기만 하다.
 
이 같은 포퓰리즘의 수렁에 한번 빠지면 헤어 나오기 어렵다. 한 나라 경제가 휘청이다 못해 침몰할 수도 있다. 한때 지구촌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를 보자.

2차 세계대전 후 후안 페론 대통령이 뿌린 페론주의의 불씨는 수차례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꺼지지 않고 있다. 그사이 9차례 국가 부도를 당한 아르헨티나 국민들은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베네수엘라는 2013년 마두로 대통령 취임 이후 국내총생산(GDP)이 90% 이상 감소했고 국민의 20% 이상이 국외로 탈출했지만 대통령은 재선에 성공했다.
 
경기 침체로 신음하는 중소 상공인을 지원하고 지역 균형 발전을 추구한다는 명분에 반대할 사람은 많지 않다.

하지만 민심을 달래기 위한 금융 포퓰리즘으로 기업과 소비자가 희생하고, 금융산업 전체가 후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금융시장의 경쟁 원리는 무시한 채 모든 문제를 ‘관치’로 해결하려는 오래된 병폐가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
 
정치권과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시장에서 공정한 경쟁이 이뤄지도록 룰을 만들고 시장질서가 유지되도록 감시하는 것이다. 또 한국이 선진금융 국가로서 자리매김하도록 지원해야 한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또다시 보여주기식 정책을 펼친다면 기업과 소비자, 나아가 지역사회에 치명적일 수 있다는 점을 정부와 정치권은 분명히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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