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열 칼럼] 조용히 이긴, 메르켈의 16년

2020-12-17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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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열]




2021년을 전망하는 책자와 기사들이 쏟아지고 있다. 내년 10월 총선 이후에 물러날 것이라고 예고한 메르켈 총리에 관한 글이 눈에 띄었다. 독일 국민은 물론 유럽인들이 메르켈의 퇴장을 아쉬워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독일의 공영방송 ARD가 지난 11월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메르켈에 대한 지지율은 74%에 달했다. 조선시대에 선정을 베푼 목민관이 떠나지 않게 해달라고 백성들이 조정에 청원하던 ‘원유(願留)'에 해당한다. 어느 나라의 지도자건 집권 마지막 해에는 레임덕에 빠지기 쉽고 지지율이 바닥을 기기 마련인데, 집권 16년째이고 은퇴를 예고한 메르켈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하는 이유가 뭘까? 코로나에 잘 대처한 것 이외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메르켈의 ‘무티 리더십’이 공고한 지지율의 토대다. 독일어로 무터(mutter, 어머니)가 아니고 무티(mutti, 엄마)다. 소탈하고, 검소하고, 꾸밈이 없어서 여야를 막론하고 많은 국민에게 사랑을 받았다. 퇴근 후 장바구니를 들고 장을 보는 모습이 찍히기도 했고, 공식 행사장에서의 검소한 옷차림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엄마처럼 온화해 보이는 메르켈이지만 불의와 부패에는 단호했다. 외유내강의 면모였다. 메르켈은 한때 ‘콜의 양녀’로 불렸다. 헬무트 콜 총리가 1991년 당시 서른일곱의 정치 신인 메르켈을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발탁해줬기 때문이다. 10여년 후에 헬무트 콜 전 총리의 정치자금 스캔들이 터졌을 때, 메르켈은 단호했다. 기민련(CDU)과 콜의 결별을, 콜의 정계 은퇴를 요구하는 ‘칼럼’을 언론사에 보냈다.

메르켈은 침묵을 무기로 삼은 보기 드문 정치인이다. 동독이라는 감시체제에서 30대 중반까지 사는 동안 터득한 생존 전략이었다고 한다. “우리 사회는 침묵이 좀 부족합니다. 실은 너무 시끄러워졌어요”라는 언론 인터뷰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2005년 총선 전날 벌어진 TV토론에서 슈뢰더의 거친 공격에 침묵으로 맞섰다. 토론에서는 진 것처럼 보였지만, 다음 날 선거에서는 메르켈이 이겼다.

메르켈은 2015년에 타임 지의 ‘올해의 인물’로 선정됐다. ‘인기 없는 정책’으로 신뢰를 얻었고 상을 받았다. 재정위기의 그리스를 돕지만 엄격한 구제금융의 전제조건을 내걸었으며, 시리아 난민을 100만명 이상 받아들였고,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았다.

메르켈은 위기에 강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2011년 남유럽 재정위기, 2015년 시리아 난민의 대규모(100만명 이상) 유입 등 독일과 유럽의 위기 때마다 토론과 설득과 인내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올해 초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메르켈은 침착했다. 통제 가능하다고 허세를 부렸던 지도자들과 달리, 실질적 대처방안을 차분하게 전달했다. 노부모를 만나지 마라,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당부했다. 전문가의 말을 경청하고 전달했다.

메르켈은 경제적 측면에서도 성과를 냈다. 여러 번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EU 공동체와 유로화(貨)를 지켜냈다. 독일의 실업률은 취임 초기인 2005년 11.2%에서 2018년 3.4%로 하락했고, 고용률은 같은 기간 65.5%에서 75.9%로 상승했다. GDP 대비 경상수지 비율이 4.7%에서 7.3%로 증가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독일 산업의 경쟁력이 꾸준히 향상되었다. 메르켈이 지난 10여 년간 인내심 있게 디지털 혁신을 추진한 결과다. 메르켈은 2010년경부터 ‘플랫폼 인더스트리 4.0’, ‘아르바이트 4.0’ 등 4차 산업혁명 관련 정책을 일관성 있게 추진했다. 그 결과, 지금 독일은 ‘스마트 팩토리’와 ‘디지털 혁신’을 선도하는 나라로 변신했다. 지멘스, 보쉬, SAP 등은 디지털 혁신을 선도하는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했다. 브레인랩, 에네르콘 등 작지만 강한 기업(히든챔피언)들이 경제의 허리를 뒷받침하고 있다. 재정수지와 국가부채 등 거시 건전성도 유럽 최고 수준이다.

또한, 거대 야당과의 대연정을 성사시키는 유연함, 당파적 이해를 벗어난 포용적 정책(환경·이민·성소수자), 참여와 타협을 도출해 내는 인내심 등도 ‘메르켈 16년’을 가능케 했다. 남북과 동서로, 세대와 계층으로 갈라진 한반도가 독일과 메르켈을 배워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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