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설계를 이어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인물의 감정선을 유지하되 한걸음 나아가 성장하는 '승이'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하지원은 아역배우 박소이가 넘긴 '승이'를 묵묵히 그려나갔고 한 인물의 성장 과정을 완성해냈다.
'어른' 승이는 영화 말미 등장하기 때문에 등장마다 최고조에 이르는 감정선을 연기해야 했다. 힘들 때도 있었지만 배우들간 찰떡같은 호흡으로 이겨나갔다. 카메라 밖도 영화의 일부라는 하지원은 '담보'와 영화 현장에 대한 넘치는 애정을 보여주었다.
"시나리오를 읽고 승이가 받은 사랑을 관객들에게도 전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승이는 특별한 사랑을 받고 자란 아이잖아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이었지만 더욱 더 진한 가족이 되어가는 모습이 인상 깊었어요. 제가 할 일은 두 아저씨의 사랑을 받고 자란 승이가 기죽지 않고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거였죠."
"시간이 흘러 승이가 두석을 '아빠'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을 관객들도 함께 느끼게 해주고 싶었어요."
성동일과 김희원이 어린 승이를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을 모두 경험하고 연기로 풀어나간다면 하지원은 인물들의 감정을 톺아보고 자기 식대로 해석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실제 배우들이 '중간 합류'를 꺼리는 이유 중 하나다. 특히 하지원의 경우 어른 승이가 병든 엄마를 대면하는 장면이나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마주하는 등 매 장면마다 고조된 감정을 연기해 감정적으로, 체력적으로 힘들 수밖에 없었다.
"제 첫 촬영이 엄마를 만나는 장면이었어요. 속으로 '이 스케줄이 말이 되나?' 걱정도 했죠. 감독님께서 그 상황과 승이의 감정에 맞는 음악을 보내주셔서 그걸 들으면서 감정을 잡았어요. 연기하면서 긴장도 많이 했는데 엄마 역의 김윤진 선배님, 할머니 역에 나문희 선생님은 얼굴만 봐도 감정이 막 올라오더라고요. 존재만으로도 엄마, 할머니가 되시는 것 같았어요."
하지원은 작품 속 인물이 되기까지 자신만의 '루틴'을 반복한다. 해당 인물을 위한 OST나 향기를 만들며 캐릭터에 일체감을 느낀다.
"깊이 파고들지 못하더라도 관련 도서라도 훑어보면서 인물이 느꼈을 감정들을 공유하려고 해요. 그중 하나가 OST를 만드는 일인데 평소 음악을 찾고 들어보는 걸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해당 장면마다 테마곡을 선정하기도 하고요."
하지원의 플레이리스트는 흡사 그의 필모그래피와 같다. 그가 직접 선별한 곡들과 플레이리스트에 영화 제목을 붙이기 때문이다. 하지원의 플레이리스트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며 영화 '담보'는 어떤 곡들로 채워 넣었는지 물었다.
"주로 가사가 없는 곡들을 담았어요.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분위기의 곡들로 구성했죠. 승이의 순수함이나 마음 상태를 느낄 수 있도록 이요."
줄곧 격양된 감정을 연기해야 하는 하지원에게 선배 배우들은 버팀목 같은 존재였다. 감정이 혼란하거나 고민될 때면 성동일, 김희원의 눈을 바라보며 승이의 호흡을 되찾았다.
"성동일 선배님은 촬영 현장에 들어설 때부터 이미 아빠예요. 비록 나이 많은 딸이지만 제가 나이를 신경 쓰면서 연기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 같아요. 아빠 그 자체로 다가와 주시니까 어색하거나 서먹한 분위기도 전혀 없었고요."
종배 역의 김희원과는 끊임없이 작품과 캐릭터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마치 신인 시절 같은 기분에 빠지기도 했다.
"김희원 선배님과는 계속해서 콘티나 연기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함께 만들어갔어요. 종배와 승이가 사라진 두석을 찾으러 가는 길을 감정적으로 조화롭게 보여줄 수 있도록 호흡을 맞춘 거였죠. 두 사람이 계속 차안에만 있다 보니 단조로울 수 있어서 연기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보여줘야 했거든요. 마치 신인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만나면 계속 연기 이야기만 하고요."
가족의 사랑은 영화 '담보'의 핵심 주제다. 영화 관람을 마치고 나서도 오래도록 가족에 대해 애틋함이 남았던 작품. 하지원 역시 승이를 연기하며 가족들을 떠올리곤 했다.
"배우마다 차이가 있겠지만 저는 연기할 때 저의 진짜 감정을 꺼내곤 해요. 돌아가신 아버지는 늘 그립거든요. 늘 제 곁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입 밖으로 불러본 지 너무 오래됐잖아요. 한동안 불러보지 못했던 '아빠'라는 말을 꺼내는 순간 감정들이 확 몰려오더라고요."
폭발적인 감정을 쏟아낸 뒤엔 배우들, 스태프들과 모여 술잔을 기울였다. 영화 촬영장에서 스태프들을 챙기며 조촐한 뒤풀이 자리를 즐기는 성동일을 주축으로 하지원도 함께 '힐링'하는 시간을 가졌다고.
"영화를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카메라 밖에서 나누는 호흡이나 공기 같은 것도 상당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게 영화의 일부라고 생각하고요. 촬영을 마치고 나면 함께 모여서 맥주도 마시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힐링했어요. 그런 분위기가 정말 좋더라고요. 그런 과정을 함께해서 그런지 두석, 종배에게 금방 친밀감을 느끼기도 했고요."
벌써 데뷔 25년 차를 맞은 베테랑 배우지만 여전히 도전하고 싶은 장르나 캐릭터가 빼곡하다.
"더 많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전 아직도 멀었죠. 멜로 같은 경우도 20~30대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고 지금 제 나이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또 있잖아요? 앞으로도 좋은 시나리오를 계속 만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