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청률29% 나훈아의 비밀(3)] "대통령 목숨 건 적 있나"고 물은 까닭

2020-10-01 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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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훈아는 삼성 개인공연을 거부하며 말했다 "나는 대중예술가이니 표 사서 보러오라"

[KBS2 '나훈아 대한민국 어게인' 공연의 한 장면.]



정인숙 사건 때 풍자가로 쓰인 '사랑은 눈물의 씨앗'

나훈아의 창법은 당시 선배 가수이던 남인수나 이난영과는 달랐다. 곱고 부드럽게 부르는 게 아니라 깊이 밀어내고 흔들고 뒤집고 꺾는 노래였다. 그가 이런 창법을 터득한 것은, 천부적으로 타고난 감각과 기질이 있었겠으나, 외할머니의 축음기를 통해 민요를 익숙하게 들었고 어머니와 함께 곧잘 국악공연을 보러다닌 덕분이라고 한다. 26세 나훈아의 목소리엔 국악의 리듬처럼 극적으로 꺾이고 출렁이는 끼와 솜씨가 배어있었다.

후라이보이 곽규석이 사회를 본 동아방송의 라디오 프로그램이 첫 무대였다. 처음 듣는 강렬하고 끈적하면서도 숨넘어갈 듯 간드러지는 목청에 여성들이 열광했다. 나훈아는 1966년 '천리길'로 데뷔를 했지만, 곧바로 배호의 '황금의 눈' 표절 시비에 휘말린다. 급히 신인가수를 알릴 홍보곡을 바꿨다. 이렇게 해서 대표곡이 된 '사랑은 눈물의 씨앗'(남국인 작사 김영광 작곡)은 큰 히트를 했다. 그 무렵 전축이 있는 집에는 '디폴트'처럼 나훈아의 음반이 있었다.

이 노래는 희한하게도 국회 본회의에까지 등장한다. 1970년 여대생 정인숙 사건 때였다. 정일권 국무총리의 자식을 임신한 것으로 알려진 그녀의 피살사건 배후에 청와대가 있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당시 신민당 조윤형 의원이 대학가에 '가사를 바꾼 이런 노래'가 유행한다면서 진실을 밝히라고 요구한다. "아빠가 누구냐고 물으신다면/청와대 미스터정이라고 말하겠어요/어느날 당신이 나를 죽이지 않았다면..."으로 시작하는 노래였다. 나훈아의 노래가 기폭제가 됐던 이 사건은, 당시 조국 근대화를 이뤄내면서 국민의 호응을 얻었던 제3공화국을 파탄으로 이끄는 계기가 되었다. 

'고향으로 가는 배'와 북한 김정은의 형

이번 공연 도입부에서 열창했던 '고향으로 가는 배'(1982년 발표)는 사연이 있는 노래다. 2017년 11월 공연 때 나훈아는 피살된 북한 김정남(김정은의 형)의 얼굴을 스크린에 띄웠다. 김정남이 아주 좋아하는 노래였고 노래방에서 이 노래만 열 번을 부르며 흐느꼈다고 하는 노래다. '꿈을 잃은 사람아 고향으로 갑시다'라는 구절이 귀에  들어오는 애절한 노래다. 권력자의 아들로 태어나 자기 나라로 가지 못하고 이국을 떠도는 심경이 그 노래에 들어앉았을 것이다. 원래 '고향으로 가는 배'는 1981년 김연자가 먼저 발표했던 곡이었다. 물론 이번에 이 노래가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한가위를 맞아 고향을 그리는 사람들을 위해 분위기를 돋우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1985년 분단 40년만에 남북 이산가족 교환상봉이 있었고 남북 예술단 교류도 함께 이뤄졌다. 나훈아, 하춘화, 김희갑 등 연예인과 국악인들이 평양을 방문했고, 또 북한 예술인들이 서울에서 공연을 가졌다. 나훈아는 평양공연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평양 아줌마'라는 곡을 작사 작곡한다. 이 곡이 발표된 뒤 방송에서 노래가 나오면 실향민과 탈북자들이 하염없이 울었다. "오늘따라 지는 해가 왜 저다지 고운지/붉게 타는 노을에 피는 추억 잔주름에 고인 눈물/하루에도 열두 번씩 그리운 고향 엎어지면 코 닿을 듯 가까운 고향/아아 오마니 아바지 불러보는 평양아줌마..."로 시작한다.

나훈아는 2020년 신보 '아홉 이야기'라는 앨범을 냈다. 그중 마지막 9번곡은 '엄니'라는 작품이다.  1987년에 나훈아가 직접 작사작곡했다. 광주민주화운동으로 희생된 청년들을 추모하고 망자의 어머니들을 껴안는 노래다. "엄니 엄니 워째서 울어쌌소/나 여그 있는데/왜 운당가 엄니 엄니/뭐 땀시 날 낳았소..."로 시작한다. 그는 그해 광주시 망월동 5.18묘역(현재 구묘역)에 참배하고 엄니가 들어있는 노래 테이프 2,000개를 광주MBC를 통해 만들어(자비로 제작) 유족들에게 전하고자 했다. 하지만 당시 정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 노래는 33년이 지난 올해에야 발표됐다. 영남 사투리를 쓰는 나훈아가 호남방언을 제대로 쓰기 위해 그곳의 지인들에게 가사를 감수 받기도 했다. 2018년 나훈아는 광주 콘서트에서 이런 사실을 밝힌 바 있다. 

"내게 애인이 생겼어요"

8월에 발매된 앨범에 담긴 신곡은, 자전적(自傳的)인 냄새가 물씬 풍겨 노래는 핑계이고 세상을 향해 공개적인 고백을 하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 중에 하나가 '내게 애인이 생겼어요'다. "내게 애인이 생겼어요 너무 좋아 죽습니다/내가 사랑에 빠졌어요 자랑하고 싶다구요/난생 처음으로 향수도 뿌리고/핑크빛 셔츠로 멋도 부리고요/교회도 가려구요 왜냐면 그녀가 기도하는 모습을 봤거든요" 이 가사에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 달인(達人)이라고 할 수 있는 나훈아의 호소력이 깊이 담겨있지만, 그의 개인사를 다시 생각하게 한다. 세번째 부인과의 결별 후에 새로운 상황이 생긴 게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영화배우 김지미와 사실혼 관계에 들어간 것은 1970년대였다. 나훈아에게 서예를 배우도록 인도한 것은 김지미였다고 한다. 나훈아는 "그녀는 나를 남자로 만들어 주었다"고 했고, 김지미는 "참으로 남편으로 믿고 의지할 만했던 사람이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두 사람의 동행이 그리 오래 가지는 못했다. 1980년대 초반 '사랑'이란 달달한 노래를 발표할 무렵, 그는 가수 정수경(세번째 부인)과 동거를 하면서 첫 아들을 얻었고 1983년에 결혼했다. '무시로('시도 때도 없이'라는 뜻)'와 '갈무리' '내 삶을 눈물로 채워도'라는 곡을 히트시키며 인기를 이어갔다. 다만, 방송 출연은 자제하는 편이었기에, 지상파TV에선 명절이 되면 나훈아 모시기 경쟁을 벌였다. 2000년이 되면서 나훈아는 연예생활을 거의 접고 칩거를 거듭했다. 가끔씩 하던 콘서트도 2006년 순회콘서트 이후 어떤 사건으로 끊기고 말았다.

2008년 일본의 야쿠자와 한 여배우를 놓고 싸움이 붙었다는 소문과 함께 '거세설(說)'이 나돌았다. 나훈아는 긴 머리에 하얀 수염이 인상적인 모습으로 생중계 기자회견을 자청했다. 그는 "제가 바지를 내려서 5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아니면 믿으시겠습니까?"라고 말을 하며 벨트를 풀어 지퍼를 내렸다. 이때 팬들이 "믿습니다"라고 외쳤다. 이 일로 나훈아의 스캔들은 급히 진정됐다. 그는 그 뒤의 인터뷰에서 "여러분들이 펜으로 사람을 죽이는 겁니다"라며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이 기자회견을 두고 "소문의 칼바람에 직접 반격하는 나훈아의 정면돌파는 신선했고, 저래서 슈퍼스타로 한 세대를 풍미했구나 라고 인정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는 평가(경향신문 차우진기자)가 있기도 했다.
 

[나훈아 대한민국 어게인 공연.]



삼성 개인파티 공연을 거부한 나훈아

2010년 1월 삼성그룹 고문변호사를 지낸 김용철이 내부 고발 형식의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냈다. 거기엔 나훈아 얘기도 등장한다. 삼성에서 개인 파티에 공연을 요청했을 때 유일하게 거부를 했던 연예인이 나훈아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대중예술가요. 내 공연을 보기 위해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노래합니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표를 끊으세요." 1992년 당시 여당에서 정계입문을 권하자 이렇게 말했다. "난 가수가 천직입니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갈잎을 먹어서 되겠습니까."

2014년 정수경과 이혼에 합의했고 그는 대중의 눈에서 멀어졌다. 나훈아가 활동을 재개한 것은 2017년이었다. 서울 콘서트 예매가 3분만에 매진될 정도로 대중은 열광했다. 나훈아 콘서트 티켓을 사면 효도 못사면 불효라는 말이 나왔고, 이 공연은 '효자판독기'가 됐다. 그 이후로 매년 전국 순회 콘서트를 가져왔다. 올해는 코로나19 때문에 공연을 고심하다가, '비대면 공연'을 방송으로 송출하는 방식의 특별한 이벤트를 열게 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칩거와 관련해 신비주의는 가당치 않다고 일축한다. 예술적 창작력이 고갈되었다고 느꼈기에 영감을 얻기 위해 11년간 세계를 떠돌았으며, 신곡 앨범을 만들면 반년에서 1년은 걸리는데 그 작업하느라 사람들의 시야에서 멀어져 있었던 것이라고 설명한다. 뇌경색이나 못 걷는다는 소문까지 돈 것에 관해서는, "자신이 건강해서 얼굴을 못들 정도"라고 조크를 하기도 했다.

54년 한국 최고의 가수이자 스타로 살아온 나훈아는, 다양한 개인적 시련을 겪으면서도 대중예술가로서의 본분에 충실했고 '본분을 벗어나는 일'에 대해선 지나칠 만큼 단호했다는 걸 지난 행적들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오직 노래로 말하는 가수였다. 

"대통령이 목숨을 걸었는가"

이날 공연에서 보여준 세 가지 주제는 그의 노래들이 향하고 있는 지속적이면서도 열정적인 관심사를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는 고향과 사랑과 인생을 노래해왔다. '고향'은, 전쟁과 산업화로 생긴 '이산(離散)과 귀소(歸巢)'의 꿈들을 담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가 자주 놓치고 있는 가족에 대한 감정들을 드러내 돌이켜보게 한다. '사랑'은, 세상이 좋아지고 사회가 발전할수록 오히려 황폐해져가는 감정을 살려내려고 한다. 그가 겪었던 사랑의 기억들 또한 거기에 진심을 더하여 녹아들어 있을 것이다. 또 하나는 70세를 넘긴 연륜을 내장하면서도 세상의 질곡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추구하는 '찢청'의 정신같은 걸 담는다. 그것이 '인생'이다. 거기엔 깊은 허무주의와 고뇌어린 질문들도 들어있다. 

이번 공연 도중 나훈아는 IMF 외환위기, 코로나 사태 등을 언급하면서 문득 이렇게 말했다.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 때문에 목숨을 걸었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이 나라는 오늘 여러분이 지켰습니다. 지금의 코로나도 세계 1등 국민인 여러분 덕분에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이런 말도 했다. "KBS가 국민의 소리를 듣고 같은 소리를 내는, 여기저기 눈치 안 보는, 정말 국민들을 위한 방송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KBS는 거듭날 겁니다." 언론들은 대통령에 대한 작심발언을 내놓았다고 해석하기도 하고, 또 공영방송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고 말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 것일까.

대통령과 언론이 최근의 문제들에 대해 '목숨을 걸 만큼' 헌신적이지 못했다는 인식은 국민인만큼 누구나 할 수 있다. 나훈아 또한 일정한 비판의식을 지닐 수 있다. 그러나 한가위 공연 자리에서 굳이 그런 비판으로 호기를 부렸을까. 그러기에는 문화예술인 본연의 자부심이 너무 강한 것이 나훈아다. 그보다는 직정적(直情的)으로 '자기를 버리고 주어진 일에 헌신하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자기의 소신 정도를 담았을 가능성이 있다. 의료인들은 그에게, 우리 모두에게 그런 멋진 한국인으로 보였다. 그가 광주의 어머니에게 보여준 것, 평양 아줌마를 생각하며 쓴 것, 나는 대중예술가이니 표를 사서 나를 만나러 오시오,라고 삼성에게 일갈한 것. 그것이 나라와 세상을 위한 옳은 길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아닌가. 그의 노래는 그의 진심을 담은 말들이다. 하나하나 국민의 에너지가 되는 신명이며 흥(興)이다. 보름달처럼 모든 사람이 저마다 기운을 받아가서 모두의 에너지로 사용하기를 원했을 것이다. 그게 나훈아라고 생각한다. 이 공연의 타이틀이 '대한민국 어게인'인 것을 보라. 그가 꿈꾸는 것은 여기에 있다. 정치나 언론이 저마다 분쟁하고 갈등하느라 소모전을 벌이지 말고, 한번 다시 멋지게 일어나 보자는 메시지다. 한국은 할 수 있다는 걸 그는 믿는다. 

나훈아는 자신의 노래들이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문화자산'이 되는 것을 꿈꾸는 쪽에 가깝다. 그게 요즘 꿈틀거리는 '트로트 르네상스'의 정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훈아에 열광하는 것도, 우연한 일이겠는가. 

                                  이상국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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