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한 유리병에 금색 뚜껑을 가진 술병. 빨간색 한자가 박힌 세 종류의 병을 그려보자. 중국집 혹은 양고기 음식점에서 주문했던 연태고량주를 떠올린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마시던 연태고량주가 한 회사의 같은 제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다시 말해 “000 하나요”하며 먹던 특정 소주가 같은 회사에서 만들던 제품이 아니었다는 얘기다.
◆이번 판결은 카피캣에 대한 경고장
12일 서울 광화문에서 만난 법무법인 한결의 윤복남 변호사는 “연태고량주를 독점적 상표권으로 인정했다는 점은 수많은 카피캣 제품에 대한 경고 메시지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 사건을 전담한 변호사다.
이 사건의 본질은 연태고량이란 상표를 독점할 수 있는지 여부다. 원고회사가 2004년부터 독점수입하고 있는 연태고량의 한자표기는 烟台古酿이다. 연태고량주 인기가 높아지자 피고는 2017년 9월부터 다른 중국 고량주회사로부터 술을 수입해 烟台高粱이란 이름으로 국내에서 판매해왔다.
비슷한 소리를 내는 단어 '고량(高粱)'만 바꿔 상표등록도 했다. 술병 디자인도 좌·우 모양만 다를 뿐 외관도 비슷하다. 현재 피고와 같은 방식으로 한자를 바꿔 연태고량주로 판매하는 곳은 무려 6곳이다.
윤 변호사는 “원고는 이 제품 판매로 매년 100억원 이상 매출을 올려왔다”며 “제품의 시장점유율이 60% 이상을 넘어서면서 피고는 유사한 술병의 제품을 판매, 원고의 인기에 무단 편승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피고는 연태란 중국 소재 도시 명칭이고, 고량주(高粱酒)는 술의 제조 방법을 말하는 보통명사이기 때문에 독점적인 상표권을 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전 판결에서 사법부는 보통명사 상표를 독점으로 보지 않았다.
◆재판부는 왜 원고 손을 들어줬을까
그러나 재판부는 소비자들이 두 상품표지를 혼동할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소비자들이 상품을 구매할 때 한자를 한 글자씩 분리해 인지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표지와 병이 주는 인상에 의해 상품을 식별한다고 본 것이다. 아울러 ‘연태’와 ‘고량주’가 보통명사라 해도 원고가 대중화시킨 상품인 만큼, 부정경쟁방지법에서 보호하는 상표권에 해당한다는 게 재판부의 견해다.
윤 변호사는 “식별력을 인정받기 위해선 매출과 시장점유율이 얼마나 높은지를 봐야 한다”며 “식별력을 높이기 위해 광고와 선전행위를 얼마나 많이 했는지도 판단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상표권 독점을 인정받지 못한 사례로는 2010년 7월 떡 제조 및 판매업체 ‘여의도떡방’ 판결을 들 수 있다. 여의도떡방 운영자는 ‘여의도떡방과 유사한 상표를 사용해 부정경쟁방지법을 위반했다’면서 여의도떡집 등을 상대로 소송을 냈지만 패소 판결 받았다.
당시 재판부는 “여의도는 보통명사이고 알려진 지명”이라며 “아울러 원고가 업체 광고를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했음을 고려했을 때 피고가 2003년 4월부터 여의도떡집을 사용한 것에 대해 부정경쟁 행위로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현재 연태고량주 사건은 상대방의 상고로 대법원으로 올라가 있다. 만약 대법원이 2심 고등법원과 같은 판결을 내놓으면 연태고량을 따라 한 제조업체는 원고에게 5000만원을 배상하고, 앞으로 술병과 상표 모두 쓸 수 없게 된다.
윤 변호사는 "다른 카피캣 제품 제조업체 5곳에도 경고장을 보낸 상태"라며 "단계적으로 준비해 다른 카피캣 업체를 대상으로도 소송을 진행할 계획"이라고 전했다.
◆지식재산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 필요
지식재산권에 대한 식별력을 인정받는 것은 사용자에게 보통명사 사용에 대한 독점권을 주는 것이다. 잠재적인 경쟁을 뺏어가는 것이기 때문에 재판부도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윤 변호사는 “지식재산권을 보호하려면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사회적인 합의가 필요하다”며 “과도하게 넓은 보호를 하면 사회의 공공자산이 침해돼 인정 범위가 넓어질수록 공공영역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지식재산권은 개인의 창조적인 활동으로 만들어진 결과물에 대한 권리다. 크게 음악, 게임, 영화 등 문화예술 부문의 저작권과 특허권, 상표권, 발명품 등 산업재산권으로 구분된다.
윤 변호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지식재산권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이뤄질 수 있는 길이 열려야 한다"며 “구글이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무슨 회사 이름이 저럴까 생각했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구글이란 단어만으로도 많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회사의 모든 가치를 담아낸 것이 구글이란 지식재산권”이라며 “우리나라는 지식재산권 보호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므로 공론화를 통해 상당한 수준의 합의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