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시론] 마이너스 금리와 시시포스의 굴레

2019-09-19 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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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채권시장 연구의 선구자인 시드니 호머는 '금리의 역사(A History of Interest Rates)'라는 책에서 지난 5000년간 금리가 어떻게 흘러왔는지 짚었다. 1963년 초판에서 메소포타미아·그리스·로마 시대를 시작점으로 삼아 출발한 대서사시는 2005년 4차에 이르기까지 개정을 거듭하며 1990년 이후의 변화상까지 아우른다.

지난 5000년간의 금리 흐름에서 눈여겨볼 건 뚜렷한 하향 추세다. 금리는 한참 오를 만하면 다시 내리기를 반복하며 추세적인 하향 곡선을 그렸다. 이 때문에 시장 전문가들 사이에서 금리정책을 떠맡은 중앙은행은 자주 '시시포스'에 비유된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시시포스는 신들을 속인 죄로 지옥에 떨어져 바위를 산 위로 밀어올리는 벌을 받았다. 이 바위는 산꼭대기에 이르면 스스로의 무게로 다시 굴러떨어지기 때문에 시시포스는 영원히 의미 없는 일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중앙은행이 시시포스라면, 금리는 시시포스의 바위가 되는 셈이다.

세자르 페레스 루이스 픽텟자산운용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최근 쓴 '시시포스와 시장'이라는 글에서 중앙은행들이 통화정책 정상화를 시도할 때마다 '시장의 신들'이 통화완화 기조로의 반전과 금리인하를 강요한다고 지적했다. 시장에 휘둘리며 금리라는 바위와 씨름하고 있기는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Fed)도 마찬가지다.

2008년 9월 미국 4위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가 파산하자 뉴욕증시 다우지수는 하루 만에 500포인트 넘게 추락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가장 큰 폭락사태였다. 이때부터 본격화한 글로벌 금융위기는 순식간에 세계 경제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른바 '대침체(Great Recession)'다. 경기부양이 시급했던 연준은 같은 해 말 '제로(0)금리'를 도입했다. 부동산 거품이 한창이던 2007년 5%가 넘었던 기준금리를 0~0.25%로 끌어내린 것이다. 금리를 더 내리지 못하게 된 연준은 부동산담보부증권(MBS)과 국채 등을 매입해 돈을 푸는 양적완화를 병행했다. 3차에 걸친 양적완화로 시중에 푼 돈이 수조 달러에 이른다.

연준의 통화정책이 반전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 건 2013년이다. 벤 버냉키 당시 연준 총재가 양적완화 축소(테이퍼링)를 처음 언급한 것이다. 시장은 '긴축발작(taper tantrum)'으로 저항했지만, 연준은 통화정책 정상화를 강행했다. 이듬해 1월부터 테이퍼링에 나서 10월에 양적완화를 완전히 끝냈고, 2015년 12월에는 기준금리를 인상하며 제로금리 시대에 종언을 고했다. 연준은 지난해까지 9차례에 걸쳐 금리를 올렸다. 그 사이 시장에서는 금리인상의 명분이 되는 경제지표 개선이 악재로 작용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 금리인상에 대한 저항이 그만큼 강했다는 의미다.

상황이 반전된 건 지난해 말부터다. 연준의 통화정책이 다시 완화 기조로 돌아설 것이라는 관측에 힘이 실렸다. 미·중 무역전쟁이 거세지면서 세계적인 경기둔화 우려가 커지면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세계 경제 성장률 전망치를 연거푸 낮추며 경기부양 기대감을 자극했다. 당초 올해 금리동결을 선언했던 연준은 지난 7월 마침내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했다. 연준을 따라 통화정책 정상화를 추진했던 유럽중앙은행(ECB)도 지난주 이미 마이너스(-)인 예금금리를 더 낮추고, 양적완화도 재개하기로 했다. 위기모드로 완전히 돌아선 셈이다. 통화완화 기조를 고수해온 일본은행(BOJ)도 경기부양력을 높이기 위한 추가 조치를 고민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저금리 기조가 장기간 이어질 것으로 관측한다. 경기둔화 공포가 중앙은행들의 통화완화를 부추기고 있는 데다 투자자들 역시 안전자산 선호 심리에 이끌려 채권에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맬패스 세계은행 총재는 17일(현지시간) 미국 싱크탱크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연설에서 안전자산 선호 심리로 수익률(금리)이 0%이거나 마이너스인 채권의 규모가 15조 달러에 이른 걸 심각한 경기둔화의 징후로 꼽았다. 그는 "투자자들이 수년간, 심지어 수십년간 투자 수익률이 매우 낮거나 마이너스가 될 것이라는 시장의 전제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라며 "이처럼 자본이 동결되는 데는 경기가 둔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내포돼 있다"고 지적했다. 맬패스는 생산에 쓸 자금이 저금리 채권에 묶여 있다며, 올해 세계 경제 명목 성장률이 3%를 밑돌아 2017년, 2018년의 절반도 안 될 것으로 내다봤다.

채권 금리가 마이너스가 되면, 만기 때 그만큼의 손해가 불가피하다. 투자자들이 이를 감수하고 마이너스 채권을 사들이는 건 유통시장에서 차익을 챙길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채권 가격 상승, 즉 금리 하락에 대한 바람이 커지면 중앙은행의 금리인상에 대한 저항이 거세질 수밖에 없다. 중앙은행이 시시포스의 굴레에 갇힐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일본은행이 대표적이다. 일본은행은 1990년대 초 자산거품 붕괴로 일본 경제가 장기불황 수렁으로 빨려든 이후 30년간 제로금리, 양적완화, 마이너스 금리 등 실험적인 통화부양책을 총동원했지만, 일본 경제는 여전히 디플레이션 수렁에서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저인플레이션, 저금리, 고부채 등 주요국 경제를 위협하고 있는 악재들을 세계 경제의 일본화 전조로 본다. 그러면서 적극적인 재정정책과 구조개혁, 기술혁신을 위한 노력이 민간투자를 자극해 경기를 되살리고 금리도 정상화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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