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경세유표12-16] 이토에서 아베까지 무궁화 군락지 야마구치 출신 총리 이야기(1)

2019-07-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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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지코와 이토히로부미와 무궁화

강효백 경희대 법무대학원 교수

일본은 천황을 중심으로 한 신(神)의 나라다. <모리 요시로(森喜朗) 일본 전 총리>

1932~1945년 조선은행(한국은행 전신)발행 모든 지폐권(10종) 앞면에 무궁화가 도안 되어 있다. <한국은행 화폐박물관>

‘무궁화= 일장기’(木槿=日の丸) 사진 3만4500장, 동영상 203편, 문건 21만2000건
'무궁화=욱일화 (木槿= 旭日花) 사진 18만2000장, 동영상 5350편, 문건33만8000건
‘야마구치 무궁화 신앙’(山口 木槿信仰) 사진 2만3700장, 동영상68편, 문건 2만200건
<재팬 야후>

고종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조선을 구원하는 유일한 희망이다. 1904.4.26.
아이들이 근화槿花 유치원 아이들과 활짝 핀 벚꽃을 구경하기 위해 이왕직 화원에 갔다. 1934.4.27
오늘부터 내 이름은 일본식으로 이동치호(伊東致昊), 곧 이토지코다. 1940.6.17
<윤치호 일기>

팽창의 꽃무늬 욱광을 발산하며 오래 피는 무궁화 신(神)의 가호인가? 63명 일본 역대 총리 중 초대 이토 히로부미부터 현직 아베 신조까지 9명의 총리가 무궁화 자생지 야마구치 출신으로 총 재임기간이 2019년 7월15일 기준, 1만5588일, 약 43년에 달한다.  7년 이상 장기집권 악성 한국 침략 팽창주의자 이토, 가쓰라, 사토, 아베 총리 넷 모두 야마구치 출신이다. 
<강효백>


◆아베가 왜 저런가? 일본 역대 제국주의 9인 총리의 본향-무궁화 군락지 야마구치현

일본은 신(神)의 나라이자 21세기 제정일치 국가다. 역대 일왕은 일본의 국교인 신토(神道)의 신이고 역대 총리는 신토의 독실한 신자이자 신사본청(神社本廳) 신토의원연맹 회장이다.

특히 현 아베 신조 총리를 포함한 내각 각료 20명 중 19명이 신토의원 연맹 간부회원이다. 예외는 창가학회를 지지기반으로 하는 공명당의 이시이케이이치(石井啓一) 국토교통상 한 명뿐이다.

과거 침략사를 반성하지 않고 팽창주의 죽음의 길로 매진하는 일본 태도의 원천은 신토의 '반성불요론’과 '무궁팽창론'에서 나온다. 아베 총리를 비롯, 역대 일본 총리들의 종교인 신토의 3대 키워드는 신대(神代, 지금이 신의 시대), 중금(中今, 무궁한 지금), 천양무궁(天壤無窮, 천황 영토의 무궁확장)이다.

천양무궁의 상징화 무궁화를 일본에서 욱일화(旭日花)라고도 한다. 그 욱일화를 군기로 형상화한 ‘욱일기’를 최초로 제작한 자는 아베 동향 선배 총리이자 일본 군국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1838~1921)다. 야마가타의 고향은 욱일화(무궁화) 야생군락지 천연기념물 소재지인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도 아사히(旭)촌이다. 참으로 공교롭고 묘하다!

[자료=강효백 교수]


미생물이 그 배양액에서 자라듯 인간도 자연적 인문사회적 환경에서 자란다. 아베가 왜 저런가? 그의 본향 야마구치현을 살펴보자

우리나라 동해 남동쪽 건너편 야마구치 현(면적 6100㎢, 인구 약 140만명, 경상남도와 자매결연 체결)은 현대 일본 보수정치의 발상지이자 팽창주의자의 왕국이다.

현내 야생 무궁화 군락지를 지난 1928년 3월 천연기념물로 지정할 만큼 무궁화가 만발한 야마구치현 출신 역대 9인의 총리들은 1885년 12월 22일부터 2019년 7월 15일 현재까지 근·현대 일본의 시공 약 133년간의 3할 이상인 1만5588일(약 43년간)을 통치해왔다.

팽창의 꽃무늬 욱광을 발산하며 오래 계속 피어나는 무궁화 신(神)이 보우 덕분일까?

7년 이상 장기집권 한국 침략 악성 제국주의자 팽창주의자 이토, 가쓰라, 사토, 아베 총리 넷 모두 야마구치 출신이다. 참고로 2019년 7월 15일 현재 기준, 장기집권 총리 순위 1위 가쓰라 다로 2886일, 2위 사토 에이사쿠(아베 외종조부) 2798일, 3위 아베 신조 2756일(7월 15일 현재), 4위 이토 히로부미 2729일이다.

그래서인지 “장관이나 장군을 노려라”라는 독특한 권력 지향형 교육 풍토가 야마구치 현을 오래 군림하고 있다.

20세기 초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총선에서 일본 43개 현 가운데 자민당 지지율이 제일 높은 ‘보수 왕국’의 챔피언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자민당 중의원 4석, 참의원 2석 모두 자유민주당 의원이 석권하고 있는 상황은 아예 화제 꺼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지극히 마땅한 자연의 법칙같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와 그의 동생 기시 노부오는 각각 야마구치 제4선구, 야마구치 제2선거구의 오랜 터줏대감이다.

아베가 왜 저런가? 일본의 국교 신토의 최고신인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御神, 하늘을 비추는 크고 존귀한 신)이 내렸다는 '천양무궁(天壤無窮)의 신칙 설화를 대표하는 무궁화(꽃)과 그 무궁화가 자생하는 야마구치(땅)와 그 땅에서 생겨난 역대 총리 9명(사람). 즉 무궁화의 꽃(花)· 야마구치의 땅(地)· 9인의 총리 사람(人), 화·지∙인, 셋이 긴밀히 연동하며 보여온 팽창의 궤적과 지향하는 무궁의 세계를 줌-인, 줌-아웃하며 통찰해보고자 한다.

아베가 왜 저런가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동향 선배 8인의 역대 총리들과 그들에 영합한 윤치호 등 국내 종일매국노 행적과 관계를 살펴보는 게 필수다. 먼저 초대 이토히로부미 총리와 윤치호부터 이야기해보겠다.

◆윤치호가 말했다. 고종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조선을 구원하는 유일한 희망이라고

애국가 작사자 무궁화 도입자 윤치호(이토 히로부미 추도 준비위원장 역임)의 멘토 일본 초대 총리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무궁화 꽃들이 욱광을 발산하는 야마구치 현 히카리시(光市)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4년 12월 김옥균·윤치호를 배후조정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1885년 12월 22일, 일본제국의 초대 총리대신이 되었다. 그는 청일전쟁을 지휘하고 1895년 청국과 강화조약을 체결해 조선의 통치권을 획득했다. 미우라 고로 주한 일본 공사에 의해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도 일으켰다. 1904년 2월 4일엔 원로로서 어전회의에서 러일전쟁 개시를 결정했다. 청일 전쟁 개시 이후인 그해 3~4월에는 서울을 방문해서 윤치호 등 조선의 지일인사들과 함께 일본과 조선의 협력방안을 논의하고 고종을 만나 일본에 대한 협조를 당부했다고 일본 문헌은 기록하고 있다.  

오후 3시에 민 씨 3명과 조 무관과 함께 이토히로부미 후작을 방문했다. 이 노 정치가는 지난번 서울에서 만난 이후로 1년 반이 지났음에도 변함없어 보였다. 민병석 씨가 이토 후작에게 자신은 내각과 추밀원의 조직과 운용을 공부하기 위해 조선 황제의 명으로 파견되었다고 말했다. 이토 후작은 이렇게 응수했다.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귀국의 황제가 지금까지의 방식대로 하는 한, 새로운 법과 헌법은 귀국에 어떠한 기여도 할 수 없습니다. 황태자가 법률을 만들 수도 있지만 일단 법률이 만들어진 뒤에는 황태자 자신도 그것을 준수해야 합니다.”
일본은 조선에서 모든 악의 뿌리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을 일본의 애정 어린 품속으로 몰아넣기 위해 그 뿌리를 보호하고 육성할 것이다. <윤치호 일기 1905년 7월 27일>


윤치호가 1년 반 전에 이토를 만났다는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 영문 일기 1904년 1월에서 4월까지 일기를 전수 분석했으나 이토를 만났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그해 4월 26일 일기에 이런 고약한 대목이 나온다.

나는 믿을 만한 소식통을 통해 고종 황제가 일본 지도를 가마솥에서 삶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본과 일본의 대의명분을 저주하는 특이한 방법이긴 하다. 일본인은 황제가 일본과 양립할 수 없는 적이고, 조선의 최악의 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또한 황제의 자유를 구속하는 것이 썩은 내정이 가하는 위해로부터 조선을 구원하는 유일한 희망이며, 그런 구원을 통해 일본은 조선인들의 호의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공사관의 일본어 통역관인 고쿠부는 현영운과 첩 배정자를 공유하고 있다. 배정자가 고쿠부를 지배하고 있고, 그는 대신을 지배하고 있으며, 대신은 조선의 황제를 지배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조선의 정치 세계에서 권력의 원천은 배정자일 것이다. <윤치호 일기 1904년 4월 26일>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고종황제가 일제를 오죽 혐오했으면 일본 지도를 가마솥에 넣고 삶았을까? 당시 외부협판(외교부 차관) 윤치호는 이런 황제를 오히려 비웃고 있다. 한술 더 떠서 고종의 자유를 구속하는 게 조선을 구원하는 유일한 희망이라는 종일매국 국가반역의 역심을 감추지 않았다.

그의 일기 말미에서 언급한 배정자는 악명높은 일제 강점기 밀정으로 이토의 첩 또는 수양딸로 알려졌다. 또한 배정자는 윤치호의 사촌 동생 윤치오의 전처이다.

상하이에서 20대 초반의 윤치호는 사창가에 수시로 출입했고, 음주에 몰입했다. 윤치호 일기(1885년 2월∼1887년 2월)에 따르면 음주 횟수 67회, 길거리 여성과 동침횟수는 11회다.  게다가 위키디피아는 이름을 모를 두 명의 첩에다가 호적에 올린 자녀 수만도 6남 9녀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선총독부가 1938년 발간한 『조선의 습속(朝鮮の習俗)』이라는 책에는 조선 '요정정치'의 선구 손탁호텔에 출입한 조선의 대표적 정객은 윤치호, 이완용, 민상호, 이범진 등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요정의 역사는 호색한으로 알려진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부임을 계기로 발전기에 들어갔다.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 나쁘게 말하면 황음무도한 윤치호의 사생활 이야기는 더 이상 논하고 싶지 않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갑진늑약 체결 당일 외부대신 직인을 장악하고 외부대신 서리로 셀프승진한 윤치호

윤치호가 고종황제의 자유를 구속하는 게 조선의 유일한 희망이라는 반역 일기를 쓴 지 넉달도 채 안되는 1904년 8월 22일, 윤치호는 실제로 고종황제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과 대한민족의 자유를 구속하고 대한제국의 정책결정권을 일제에 상납하는 대역무도죄를 저지른다.

대한제국의 사망일은 1910년 8월 29일이 아니라 1904년 8월 22일이다. 즉, 이완용이 체결한 합방조약(경술국치)은 장례일 뿐이다. 윤치호가 외부서리대신 자격으로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와 체결한 제1차 한일협약(갑진늑약)이 대한제국의 진짜 사망일이다.

대한제국의 정책결정권을 일제에 상납한 갑진늑약으로 일본의 일개 사범학교 교사가 한국의 교육부 장관을, 일본의 일개 대장성(재무성)국장이 한국의 재무부 장관을, 일본의 일개 부(副)무관(중령)이 한국의 국방부 장관을, 일본의 일개 경시(총경)가 한국의 경찰청장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고문관을 맡아 대한제국은 이미 망한 거나 다름없게 되었다.

기존 역사책에는 광무 8년(갑진년) 1904년 8월 22일 외부대신 서리 윤치호와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했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최근 필자가 발견한 주한일본공사관 문서(문서 번호 조회 제150호) 한 건에 적힌 내용을 보면 치가 떨린다. 그건 외부대신 이하영이 갑진늑약 서명을 끝까지 거부하자 외부협판 윤치호가 체결 당일 외부대신 서리에 스스로 올라 외부대신 직인을 장악하고 하야시 일본공사 ’각하‘에게 자기가 협약을 체결하겠다고 보고하는 대한제국 사망선고서와 같은 죽음의 문건이었다.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다음은 문제가 된 문서 원문의 번역본이다.

문서제목: <외부대신서리 윤치호 접임통보>
발신일: 광무8년8일22일 1904년 8월 22일 발신자 대한외부대신서리외부협판 윤치호
수신자:  대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곤스케 林權助

대한외부대신서리 외부협판 윤치호(尹致昊)가 대일본특명전권공사 하야시곤스케(林權助) 각하에게 아룁니다. 이달 20일 외부대신 이하영은 질병 치료를 위하여 上奏하고 본부 소유 일체의 교섭사의는 본 협판이 명을 받아 서리의 임무를 맡았기에 이에 오늘부터 직인을 인수하고 업무를 처리하게 되었으며, 이에 비문조회하오니 귀 공사께서는 청하옵건대 실사(査實)하시기 바라며 위와 같이 조회합니다.
외교부의 인장(外部之印) 1904년 8월 22일 대일본특명전권공사 林權助 각하


◆'악마의 문건' 재한일본공사관 조회 제150호 원본
 

[자료=강효백 교수 제공]

윤치호의 갑진늑약 체결로 대한제국의 정책결정권을 상납받은지 15개월 후 이토 히로부미는 1905년 11월 17일 고종과 다섯 대신을 위협해 제2차 한일협약(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켰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에 상납하는 을사늑약 역시 윤치호가 일측과 교섭 협상 조약문안 작성 총지휘 책임을 맡았다. 을사늑약 체결 당시 외부대신 박제순은 평안남도 관찰사에서 1905년 9월 17일 외부대신으로 임명된지 불과 50여일 되었을 뿐이다(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2」,114쪽).

을사늑약의 진정한 악마는 박제순 등 다섯 대신 을사오적이 아니라 윤치호였다. 을사늑약 체결 직후 박제순이 참정대신으로 승진하자 윤치호는 외부대신서리가 되었으나 한 달후 쯤 관직에서 물러났다. 국내 대다수 문헌에는 ‘윤치호가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이에 대한 반발로 자진해서 사퇴 한 것’으로 적고 있는데 사실은 전혀 아니다. 윤치호의 외부대신서리 사퇴는 을사늑약에 따라 1906년 1월 외부가 폐지되었기 때문이다(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2」 698쪽).

1906년 3월 이토가 초대 조선통감으로 취임해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1907년 7월 1일 1909년 봄, 가쓰라 다로 총리와 고무라 외상은 한국을 강제 합병할 방침을 정하고 이토와 상의했는데, 강제 합병 계획이 없다고 1907년 밝힌 이후 평소 강제 합병에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져 온 이토는 이 자리에서 강제 합병에 아무런 이의 없이 동의했다.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탄 3발을 맞고 피격 20여 분 만에 사망하였다. 같은 해 11월 도쿄에서 열린 이토히로부미의 장례식에 맞춰 장춘단에서 개최한 관민추도위원회 준비위원장을 맡았다.(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2」 698쪽)

◆내 이름은 이토지코, 1930대 이후 발행 모든 조선은행권 지폐에 무궁화 도안

서울 집. 우리 아이들 보, 영, 정은 근화(槿花무궁화)유치원 아이들과 지금 활짝 핀 벚꽃을 구경하기 위해 이왕직 화원에 갔다. <1934.4.27. 금 아름답고 따뜻함 윤치호 일기>

윤치호에게 이 시절 세상은 너무 아름답고 따뜻했을 것이다. 유치원 이름도 ‘무궁화’ 뿐만이 아니다. 그가 ‘천양무궁(천황 영토 무궁한 확장)'을 함축한 꽃 이름 ‘무궁화’로 작명하고, 그걸 또 한국의 국화(國花, 여기에서의 國은 독립국의 국이 아니라 일본의 현급 지방 단위인 ‘쿠니’(國)의 뜻, 일본이 쿠니를 현(縣)으로 완전히 개편한 시기는 1899년 이후)로 정하고, 다시 ‘무궁화 삼천리’로 애국가 후렴으로 주술처럼 암송하게 한 무궁화, 그 무궁화가 일본 대장성 인쇄국 발행 조선은행권 (1932~1945)발행 모든 지폐권에 도안되었으니...

이 대목에서 일제 강점기 일본이 한국을 상징하는 무궁화를 모조리 뽑아버렸다는 국내 기존 대다수 정경언관학계에 묻겠다. 일본이 무궁화를 뽑아버린 목적은 지폐 속에 넣기 위해서일까.

이런 말도 안 되는 뻔한 거짓말이 이 눈부신 21세기 첨단과학기술 선진강국 대한민국의 3대 국가상징의 100% 팩트 이력으로 둔갑해 통용되고 있는 현실이 참담무궁하다.

서울 집. 오늘 오후 경성부청 인구조사과에 가서 우리 식구들의 성을 ‘이토’(伊東)로 바꾼 변경서를 제출했다. 오늘부터 내 이름은 일본식으로 이동치호(伊東致昊), 곧 이토 지코다. <1940.6.17.월. 윤치호 일기>

윤치호가 하필이면 성을 ‘이토’로 바꾼 까닭은 무엇일까? 그의 영원한 멘토이자 주군인 이토 히로부미의 성 ‘이토’와 같은 발음으로 자신이 불리길 원해서였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갑진늑약 불법체결자이자 을사늑약 기초자인 윤치호가, 이완용도 못해 본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의원을 역임한 종일매국노의 대부 윤치호가, 최남선·이광수 정도로 불행한 시대의 고뇌하는 지식인, 또는 마일드한 변절자로 인식되어 있다.

윤치호가 작사하고 도입한 무궁화가 현재 대한민국의 4대 국가상징 중 태극기 하나만 빼고 국가(國歌)와 국화와 국장(國章) 3개를 동시에 지배하며 대한민국 국혼의 4분의 3을 농단하고 있다.

이러한 윤치호의 행적과 평가가 오늘날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교훈은 뭘까?

“친일하라! 친일하라! 친일하라! 그러면 살아서도 행복 죽어서도 영광 세세 대대로 행복하나니...,

독립 애국 애족 그따위 말도 꺼내지 말라! 그러면 살아서도 고통 죽어서도 암흑 세세 대대로 불행하나니....” 이란 말인가?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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