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통수만 보이는 두 사람이 검은 상의 하나 속에 들어가 있다. 둘은 강 끝의 물 위에 엎드려 있다. 하나는 빨간 바지를 입은 아이이고 다른 하나는 검은 반바지를 입은 아빠다. 아이는 아빠에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빠 등 뒤에 업혀 목을 감았고, 아빠는 아이가 떨어질까봐 아예 자신의 옷 속에 아이를 넣은 채 업었을 것이다.
소용돌이를 치던 리오그란데강은 아빠와 딸을 그대로 휘어감아 강바닥으로 내려꽂았다. 그들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건, 안간힘을 다 놓은 채 엎어진 주검으로서였다. 죽어서도 미국으로 건너가지 못한 채, 국경에서 1km 떨어진 멕시코 기슭에 흘러와 있었다. 아빠는 스물 다섯 살, 딸은 23개월된 두살 바기였다.
미국과 멕시코 접경 지역의 리오그란데강. 24일 발견된 엘살바도르 아빠와 딸의 사진(멕시코 일간신문 '라호르나다' 의 사진기자 홀리아 레두크가 찍었다) 이 말을 잊게 만든다. 2015년 지중해 터키해변에서 발견된 아일란 쿠르디가 그랬던 것처럼. 이날 한 신문의 만평은 부녀 대신 미국 자유의 여신상이 같은 포즈로 엎드려 있는 그림을 그렸다. 미국의 이민정책이 빚어낸 비극임을 풍자한 것이다.
라미레스는 딸 발레리아를 안고 먼저 강을 건넜다. 미국 텍사스주 브라운즈빌이었다. 강둑에 내려놓은 발레리아가, 아빠가 다시 저쪽으로 건너가려 하자 본능적인 두려움으로 자꾸 강으로 내려왔다. 허겁지겁 다시 딸에게로 달려간 아빠는 그를 셔츠 안에 집어넣고 고정시켜 강을 되건너기로 했다. 강 가운데서 갑자기 물살이 회오리를 쳤고, 그들은 휘말려 들어갔다. 스물 한살 아내 아발로스는 강 저쪽에서 가라앉는 남편과 딸을 보면서 절규했다. 아내는 하루 뒤인 24일 오전 10시15분쯤에 수백m 떨어진 강가에서 축 늘어진 그들을 만나 오열한다.
이민의 참극은, 나라라는 개념이 지녔던 효용의 뒷면을 보는 일이다. 이미 누리고 있는 기득권을 지키느냐, 나누느냐의 문제이기도 하고, 국가의 자국민 보호 의무의 문제와 배타적 권리 문제를 건드린다. 함부로 말하기 어렵기에 이 문제를 감상적으로, 혹은 현상적으로만 접근하는 일에 대해선 신중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그럼, 저 사진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작년 한해 미국으로 들어가려다 숨진 이민자는 283명이었다. 올해 기록될 사망자 중엔 저 두 사람도 숫자로 표시되어 들어앉을 것이다. 트럼프는 무엇을 보고 있을까.
# 참혹한 사진의 실상을 가리는 '인도주의'보다, 참담한 현실을 가리는 비인도주의가 더 옳지 않다고 생각했기에, 블러링 처리 없이 사진을 그대로 싣습니다.
이상국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