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의 新경세유표 12-12] 일왕 영토의 무궁한 확장, ‘천양무궁’으로 피어난 무궁화

2019-06-11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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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무궁화통사(4)

수상한 ‘무궁화(無窮花)’ 이름 그 출생의 비밀

1889~1945년 일제와 일제식민지의 대표 구호는 ‘천양무궁’

메이지 신궁 도처에 피어난 천양무궁 무궁화

"천양무궁(天壤無窮)은 무쿠케(ムクゲ)를 무궁화(無窮花)로 쓰는 것과 같다."
<일본 기후현 소재 진메이(神明)신사>

"천황의 지위는 「일본서기」의 ‘천양무궁의 신칙’에 유래하는 것이다."
<안도 히로시(安藤裕) 자민당 의원 2016.11.17.>

"무궁화가 피고 화가의 집을 묻는 미시마 신사 앞(木槿咲て繪師の家問ふ三嶋前)"
<메이지 시대 대표 하이쿠 시인 마사오카 시키(1867~1902년) 1897년 작>

"중국과 일본의 최고 권력핵심은 각각 시진핑의 중국 공산당 정치국과 아베의 일본회의(日本會議).(1)*
<강효백 교수>

 

[자료=강효백 교수]


◆윤봉길과 시라카와, 천양무궁과 야스쿠니신사

일본이 중국을 침략했을 때, 중국인은 일본인을 미워했지만 일본인은 중국 땅을 사랑했다. 그리고 일본인이 중국의 영토에 애착을 가지면 가질수록 중국인의 증오는 더해졌다.

고사성어(故事成語)는 비유적인 내용을 담은 함축된 글자로 상황, 감정, 사람의 심리 등을 묘사한 관용구이다. 주로 네 글자로 이뤄진 것이 많아 사자성어(四字成語)라고도 한다. 일상생활이나 글에 많이 사용된다. 사자성어는 대부분 주로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한다. 중국어에만 약 2만개 이상의 성어가 있다.

그런데 이런 사자성어의 원작자 중국인들은 입에 담는 것조차 질색하지만 일본인들은 즐겨 상용하는 아주 독특한 성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천양무궁(天壤無窮)'이다.

원래 ‘천양무궁’은 어떤 사물이나 이치 등이 '하늘과 땅처럼 변함이 없다'라는 뜻으로 「장자(莊子)」에서 나오는 성어다. 중국인들은 ‘천양무궁’ 대신 같은 뜻으로 ‘천장지구(天長地久)'를 쓰고 있다.

신화시대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변질되기 시작한 천양무궁은 특히 1868년 메이지 유신 이후 천황 ‘천(天)’ 영토 ‘양(壤)’의 ‘무궁(無窮)’한 확장을 의미하는 뜻으로 완전히 변질됐기 때문이다.

대일본제국군은 1894년 청일전쟁 승전부터 1945년 중일전쟁 패전까지 손에는 욱일기를 들고 입으로는 천양무궁을 외치면서 중국을 침략, 30만 난징대학살을 비롯 약 2000만 명의 중국인을 살상했다.
 

(맨 왼쪽사진부터) 포탄껍질로 만든 화병위에 새긴 천양무궁, 시라카와 육군대신의 천양무궁 휘호,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의거(1932.4.29.)로 폭사한 시라카와, 홍커우 의거 사흘전 윤봉길 의사, 시라카와가 배향된 도쿄의 야스쿠니 신사 경내의 무궁화[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2012년 7월 5일 난징의 한 기념관에서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1869~1932년) 일본 육군대신이 ‘천양무궁(天壤無窮)’이라는 글자를 새긴 포탄껍질로 만든 꽃병이 전시됐다.

“중국인과 개는 입장금지”로 대표되는 일제 침략기의 뼈아픈 굴욕의 기억들로 15억 중국인들의 치를 떨게 했다. 시라카와 요시노리는 바로 윤봉길의사의 1932년 4월 29일 홍커우 의거에 치명상을 입어 사망한 자이다. 지금 야스쿠니 신사에 배향되어 있는 1급 전범자이다.

◆수상한 ‘무궁화(無窮花)’ 이름 그 출생의 비밀은?

구한말 이전 우리나라의 동식물 등 사물이 한자로 표기된 거라면 거의 다 중국의 고문헌에 그 한자가 있다. 그런데 ‘無窮花’라는 글자 자체를 중국의 고문헌에서는 전혀 볼 수 없다.

국내 대다수 문헌들이 ‘목근’으로 불러왔던 것을 ‘무궁화’로 부르게 된 유일한 내력을 12세기 이규보가 중국 시를 차운한 한시(漢詩) 단 한 구절 ‘무궁(無宮)’인가? ‘무궁(無窮)’인가? 에서 비롯됐다고 하는데... 그 이후 약 700년간 장구한 한반도의 시공에서 무궁화(無窮花)라고 쓴 기록이 전혀 없다.(2)*

이는 반만년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오늘날 세계 10위권 중견강국 대한민국의 나라꽃(격)인 무궁화이름의 내력치고 너무나 남루하고 빈곤하다. 다시 말해 고려 중기 이규보가 중국 시를 차운한 한시 속의 ‘무궁인가 무궁인가’ 몽롱한 한마디로서는 ‘국토참절 국권상납 종일매국의 총설계자 윤치호가 1896년 11월 21일 ‘무궁화 삼천리’ 운운하면서부터 ‘목근(木槿)’이 별안간 ‘무궁화’로 부르게 되었는가를 설명해주는데 어림 반푼도 없이 부족하고 궁상맞다.

이 대목에서 필자의 뇌리에는 의문 부호 몇 개가 떠오른다. ‘무궁화’ 이름의 출생의 비밀은 무엇일까? 혹시 ‘무궁화’가 구한말 이후 쏟아져 들어온 일본식 한자어이거나 당시 강조되었던 표어를 차용해 만든 신조어가 아닐까?

◆1889년부터 1945년까지 일제와 일제식민지의 대표 구호는 ‘천양무궁’

지난 5월 1일 제126대 일왕으로 취임한 나루히토(德仁, 1960~)까지 126명의 일왕들의 정통성은 “천양무궁의 신칙”에서 나온다.(3)*

1868년 9월 12일 제122대 일왕에 취임한 메이지(明治, 1852년11월3일 ~ 1912년7월30일)는 막번 체제를 해체하고 왕정 복고를 통한 중앙 통일 권력의 확립하는 이른바 메이지 유신을 개시했다. 메이지 일왕은 1870년 히노마루(日の丸)와 소우탄(宗旦)무궁화를 각각 형상화한 일장기와 욱일기를 국기(일장기)와 군기(욱일기)로 제정했다. 같은해 신도(新道)를 국교로 정하고, 제정일치를 선포하는 조서를 발표했으며, 신도의 국교화와 일왕의 '신격화'를 추진해 나갔다.

이어 메이지 일왕은 1875년 신도사무국(神道事務局, 현재 아베 총리가 정치연맹간담회장으로 겸직하고 있는 ‘신사본청’의 전신)을 설립했다. 일왕가의 조상신 아마테라스를 제신으로 모신 이세(伊勢)신궁을 정점으로 전국 각지에 신의 ‘진(神)’과 메이지의 ‘메이(明)’를 합친 진메이(神明)신사(4)* 수천 개를 지정했다. 지금도 미에현의 이세신궁과 일본 전역의 4425개소 진메이 신사들의 경내외는 십중팔구 무궁화가 식재되어 있다.
 

[사진=강효백 교수 제공]

1889년 2월 11일, 메이지 일왕은 ‘대일본제국헌법’을 공포했다. 메이지는 발포식장에서 내각 총리대신 구로다 기요타카에게 헌법을 하사했는데 헌법은 일왕이 신민에게 내리는 선물이었다. 메이지 일왕은 자신의 메이지 유신의 결실로 평가되는 제국헌법 고문(誥文, 서문) 첫머리에 ‘천양무궁’을 명기했다.(5)*

‘천양무궁’으로 시작하는 이 헌법은 불멸의 대전으로 명시했기 때문에 현행 헌법으로 개정될 때까지 한번도 수정이나 개정된 일은 없었다.

메이지 유신은 한마디로 ‘명(名) 따로 실(實) 따로’, ‘종교 따로 정치 따로’, ‘국화 따로 칼 따로’를 ‘일왕의 한 개 정점’으로 결합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890년 10월 30일, 메이지 일왕은 천양무궁을 결말로 ‘교육칙어’를 발표했다.

‘천황 짐이 생각하건데 (중략) 신민은 항상 국헌을 존중하고 국법에 따라 일단 유사시에는 의용으로 봉공함으로써 천양무궁한 황운을 보필해야 한다’는 315자의 칙어를 외우게 했다. 이 교육칙어는 각급학교의 각종 교과서와 앞 부분에 가장 먼저 인쇄돼 나왔다.

메이지 유신 1868년부터 1945년 일제 패망까지 일본 본토와 한국 대만의 일제 식민지와 만주와 중국본토 동남아 통치지역과 점령지역의 대표 구호는 천양무궁(天壤無窮)- 일왕 영토의 무한한 확장이었다. 일본 본토인은 물론 한국과 대만, 만주등지의 일제의 식민지와 점령지에서 상하귀천을 막론하고 어떠한 의문도 질문도 가지지 않고 닥치고 외워야 했다. ‘천양무궁’ 의 교육칙어는 1968년 12월 5일 '메이지 숭배자'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393자의 국민교육헌장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났다.

‘천양무궁’이 각각 <제국헌법>의 앞머리와 <교육칙어>의 결말에 군림한지 5~6년이 지난 1896년 한반도에서 ‘무궁화’라는 ‘갑툭튀’ 꽃이름이 최초로 등장했다. 일왕영토의 무궁한 확장 ‘천양무궁’과 그것을 꽃나무로 함축한 무궁화는 윤치호 등 종일매국노들에 의해 널리 유포되기 시작하여 대한제국의 정책결정권을 일제에 상납한 갑진늑약(1904), 외교권을 상납한 을사늑약(1905), 군사권을 상실한 군대해산(1907), 이윽고 주권을 상실한 경술국치(1910)로 실현됐다.

"우리 황실이 일본 황실과 운명을 함께 한다면 500년 만에 끊어지게 된 제사를 이어나가서 만대토록 빛날 것이고 일본과 함께 천양무궁(天壤無窮)할 것이다."
<한일합방을 촉구하는 성명을 내면서 이용구 일진회 회장 1909.12.4.>

◆메이지 신궁 도처에 피어난 천양무궁 무궁화
 

[사진=강효백 교수]


1912년 메이지 일왕과 1914년에 쇼켄 왕후가 각각 사망하자 일본의 신민은 천양무궁을 실현한 메이지 부부를 배향하기를 바랐다. 이러한 이유로 도쿄의 중심지 시부야구에 메이지 신궁이 건설되었고 1920년 11월 1일에 안치되었다. 메이지 신궁의 전체 부지는 70만㎡, 8만5000여개소의 일본 신사 중 이세신궁 두 번째로 큰 규모다.

그런데 메이지 신궁앞역에서부터 신궁으로 가는 거리와 골목, 메이지 신궁 외원(外苑) 도처에는 제국주의 군국주의 천양무궁이 꽃나무로 화한 무궁화 나무들이 식재되어 있다. 그것도 일장기와 욱일기의 원형인 히노마루와 소우탄 무궁화 품종 위주로만.(~계속)
 

[자료=강효백 교수]




◆◇◆◇◆◇◆◇주석

(1)*일본 대표 우익단체. 일본회의 뱃지의 외곽은 국화 문양, 핵심은 무궁화 문양이다. 

(2)* 동화작가 겸 번역가 이상희가 쓴 『꽃으로 보는 한국 문화3』(2003)는 이렇게 적고 있다(네이버 지식백과 게재) ――“근세조선에 들어와서는 한글로 '무궁화'라고 쓴 예를 여러 군데서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 《사성통해(四聲通解, 1517)》: 槿 - 무궁화 ; 《훈몽자회(訓蒙字會, 1527)》: 槿 - 무궁화근, 蕣 - 무궁화슌 ;《동의보감(東醫寶鑑, 1613)》: 木槿 - 무궁화 ;《물보(物譜, 1745~1826)》: 木槿 - 무궁화”――그러나 필자가 위에 열거된 원전들을 포함 옛 문헌들을 수차례 전수 심층분석한 결과 홍만선의 「산림경제」와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 각각 1회씩 ‘無宮花(무궁화)’ ‘舞官花(무관화)’라는 (그것도 한글 표기 없는) 단 두 글자의 기록 외에는 한자로든 한글로든 ‘無窮花(무궁화)’를 쓴 예는 전혀 없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3)*「일본서기」에 따르면 아마테라스가 손자 니니기를 지상으로 보내면서 "지상은 내 손자 니니기와 그 자손들이 영원히 다스릴 땅이다.”라는 '천양무궁의 신칙을 내린다. 천황의 지위는 바로 이러한 「일본서기」의 “천양무궁의 신칙‘에 유래하는 것이다.” <안도 히로시(安藤裕) 자유민주당 의원 2016.11.17.>

(4)* 천양무궁, 영영무궁은 ‘무쿠케’를 ‘무궁화’로 쓰는 것과 같다(天壌無窮、永永無窮 ムクゲを無窮花とも書くらしい). - 기후(岐阜)현 가미카라하(各務原)시 신사부(神社部)

(5)*“짐 천황의 천양무궁의 굉장한 계획은 신의 뜻에 따라 보좌를 승계하는 것이다(皇朕レ天壤無窮ノ宏謨ニ循ヒ惟神ノ寶祚ヲ承繼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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