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연말부터 ‘식사 정치’에 시동을 걸었다.
불과 1달 새 청와대·관저에서 이뤄진 공식·비공식 식사 자리만 얼추 어림잡아도 5~7차례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문희상 국회의장과 정세균·김원기·임채정 전 의장 등 민주당 원로 정치인들과 청와대에서 점심을 함께 했다. 바로 다음날에는 국무위원들과 송년 만찬을, 같은 달 31일에는 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 등 지도부를 청와대에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다.
지난 10일에는 유은혜·김부겸·김영춘·김현미·도종환·이개호·진선미·홍종학·유영민 등 여당 정치인 출신 장관들을 청와대로 불러 만찬을 가졌고, 11일에는 민주당 원내대표단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 했다. 지난 25일에는 민주당 원외지역위원장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간담회를 열었다.
문 대통령이 최근 ‘사람이 들고 나도록 관저 앞 인수문을 활짝 열어놓으라’고 했다는 전언은 의미심장하다. ‘오비이락’처럼 노영민 대통령 비서실장이 청와대 참모들에게 대통령 대면보고를 줄이라고 한 것도 문 대통령이 퇴근 이후 '식사 정치'로 외부와의 소통을 늘려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으로 해석됐다.
역대 대통령들은 때때로 사람들을 청와대로 불러 식사를 함께 하거나 술자리를 가졌다. 가족에서부터 측근·지인, 여야 정치인과 경제인, 학자, 전문가 등이 포함됐다. 여당이나 친정부 인사들과는 친밀감과 결속을 다지고, 야당 인사들에게서는 견해가 다르더라도 입장을 듣고 의견을 나눈다. 학자나 전문가, 지인 등 정치권 밖 사람들에게서는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고(故)김영삼 전 대통령은 국무회의나 각종 회담 자리, 초청 자리에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칼국수를 내놓았다. 심지어 모 교수를 관저로 불러 장관 자리를 제안하면서도 칼국수를 대접했다는 일화도 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했던 국가대표 선수들에게도 칼국수를 내놨는데, 당시 선수들의 실망감이 매우 컸다?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회자된다.
고(故)김대중 전 대통령도 국무위원, 여야 정치인들을 청와대나 관저로 초청해 식사를 나누며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한다. 학자, 전·현직 기자들과도 교류가 깊었다. 식사 메뉴에는 낙지와 홍어 등 고향 음식이 자주 올랐다 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청와대 공식 행사든 관저든 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폭탄주 회동’을 즐겨한 것으로 유명하다. 2007년 총선이 끝난 후 당선자 초청행사, 2008년말 16개시도지사 만찬 자리에서도 폭탄주가 등장했다. 심지어 이 전 대통령은 2009년 카자흐스탄을 방문해 당시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사우나회동을 가지면서도 먼저 폭탄주를 제안했다고 한다. 이 전 대통령은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친구 사이에 폭탄주를 마신다”며 직접 보드카 폭탄주를 만들었다고 한다.
고(故)노무현 전 대통령은 청와대의 참모진들을 관저로 불러 아침식사를 함께 하며 회의를 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아침, 점심, 저녁 가리지 않고 현안과 관련된 부처 장관, 교수들을 관저로 불러 식사를 함께 했다. 현안이 없는 휴일에도 참모들에게 ‘식사 번개’ 호출을 했는데, 단골 멤버가 당시 문희상 비서실장 부부·유인태 정무수석 부부·문재인 민정수석 부부였다고 한다. ‘삼계탕’을 좋아했던 노 전 대통령은 무더운 여름이면 청와대 앞 ‘토속촌’을 자주 찾기도 했고, 이 곳에 출입기자들과 기업인들을 초대하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은 세간에 알려진 대로 4년 임기 내내 거의 ‘혼밥’을 했다. 일찌감치 가족들과 등지고 외롭게 지냈던 박 전 대통령은 어린시절 동무이자 측근인 최순실과 그 일가와 돈독히 지냈으며, 심지어 출입기록 없이 최순실이 관저를 수시로 드나들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술을 마시지 않았던 여성 대통령의 등장으로, 청와대 오·만찬 테이블에 주류 대신 오렌지·포도쥬스가 등장한 것도 박근혜정부 때부터다.
문 대통령도 취임 후 ‘혼밥’ 논란에 자주 휩싸이기도 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지금까지 매일 관저로 모든 보고서를 들고 가서 잠자리에 들기 전까지 꼼꼼하게 읽고 현안을 파악하느라 ‘저녁이 없는 삶’을 보내야 했다. 보통 저녁 식사는 관저에서 김정숙 여사와 함께 하면서 TV져녁 뉴스를 시청한다고 한다. 식사 중에도 이리저리 채널을 돌려가며 저녁 뉴스를 꼼꼼히 훑어본다고 한다.
대신 문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들과 '번개 오찬'을 즐겨하는 편이다. 식사 장소는 주로 청와대 여민관 구내식당이다. 적어도 1주일에 1번은 직원구내식당에서 식판을 들고 음식을 직접 담는 문 대통령의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단골 호출은 임종석 전 비서실장이었다. 그외 수석들도 돌아가면서 대통령의 연락을 받는다고 한다. 취임 초부터 격무에 시달리던 임 전 실장은 점심을 먹고 잠시 눈을 붙이려 했는데, 문 대통령의 호출 때문에 번번이 쉴 기회를 놓쳤다. 식사 후 강제 경내 산책?까지 한 뒤 오후 근무에 돌입해야 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취임 이후 월요일마다 이낙연 국무총리와 오찬을 겸한 주례회동을 갖고 국정 현안을 논의하고 있다. 지금까지 총리와의 오찬 주례회동은 50회가 넘는다고 청와대는 밝혔다.
최근 들어 정치권에서는 문 대통령에게 올해 협치를 위해선 여야 정치인들과 더욱 더 활발한 식사정치를 해야 한다고 요청하고 있다.
문희상 국회의장은 지난달 27일 청와대 오찬에서 문 대통령에게 “실제 그렇지 않더라도 국민들에게 혼자 밥먹는 것처럼 비춰져선 안 된다. 야당을 포함해 각계각층과 함께 같이 식사를 하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도 지난 11일 노영민 신임 비서실장의 예방을 받은 자리에서 "밥이라도 한 끼 먹자`는 말씀도 없었고, 생각도 아예 없으신 것 같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야당 의원들과도 적극적으로 만나고, 여야정 상설협의체도 활성화시키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조만간 야당과 물밑 식사정치를 본격화하겠다는 신호탄으로 해석된다.
밥 한 끼로 풀어내는 ‘식사정치’의 다른 말은 소통이고 공감이다.
“공감과 소통'이 정치의 기본이라고 늘 생각해왔지만, 내가 생각했던 공감이 얼마나 얕고 관념적이었는지 새삼 느꼈다.” 문 대통령이 지난 해 가을 한-아세안 정상회의 참석 차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비행기에서 <정혜신의 적정심리학 당신이 옳다>를 읽은 후 밝힌 소감이다.
공감과 신뢰가 있어야 소통도 가능하다. 공감하려면 먼저 경청해야 한다.
조건 없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귀를 여는, 대통령의 ‘식사 정치’가 집권 3년차 국정 성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