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9월 평양공동선언'에 합의했다. 핵무기와 핵위협이 없는 한반도를 만들자는 것이 주요 골자다. 지난 4월 판문점 공동선언에서 한 걸음 더 발전한 것이다. 다른 이념을 앞세워 반목을 거듭하던 두 정부가 평화를 찾은 사례는 과거 독일 통일을 떠오르게 한다. 그러나 식민 경험과 남북 간 내전 등 역사적 상흔을 겪은 점에서는 오히려 아일랜드와 가깝다.
아일랜드공화국(남쪽)과 북아일랜드(북쪽)는 1998년 신교계 영국과 가톨릭계 아일랜드 간 분쟁을 종식하기 위해 북아일랜드 벨파스트에서 평화 협정을 체결했다. 통일을 강제하기보다는 칼과 총은 내려놓고 평화와 공존을 향해 나아가기로 한 것이다. 이른바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다. 올해로 벌써 체결 30주년을 맞는다. 북아일랜드는 여전히 영국령으로 남았지만 양측 간 교류는 문제없이 이뤄진다.
물론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아예 없지는 않다. 독립 무장조직인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활약으로 인한 정치적 갈등, 북아일랜드 경찰 개혁 등 해결할 문제가 적지 않다. 불과 190일 남아 있는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 발효에 따른 경제적 불안감은 덤이다. 한반도도 공동선언문이라는 긴급 수혈을 통해 가까스로 평화 무드를 연명하게 됐지만 언제 어떤 변수가 생길지 불투명하다. 완전한 비핵화를 전제로 높은 수위의 대북 제재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과 북한 간 관계에 있어서도 긴장을 놓을 수는 없는 상황이다.
한 걸음 더 내디뎠다고 해서 평화 통일까지 기대할 수는 없을 터다. 다만 갈 길이 멀더라도 아일랜드 모델을 거울 삼아 경제협력부터 차근차근 접근할 수는 있을 것이다. 북아일랜드 평화 프로세스는 체결까지 수십년이 걸렸다. 중동과 아프리카 등 주요 분쟁 지역에서는 아직도 평화의 길이 요원하기만 하다. 한반도가 불과 1년여 만에 평화 무드에 접어든 데 대해 외신이 놀라워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한국판 '평화 프로세스'의 기적에 대한 기대감을 놓을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