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중국의 기술전쟁이 심화하는 가운데, 주요 경제국들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양국의 기술 주도권 경쟁 결과가 향후 몇십년 관련 산업의 추이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특히 첨단기술 분야에서 앞서가는 일본과 유럽은 미국과 함께 중국의 지적재산권 침해에 맞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반면 인도와 러시아 등 개도국은 중국과 함께 미국의 보호무역에 맞서겠다는 입장을 내세우면서 기술전쟁에 있어서는 선진국 대 개도국 전선이 형성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 독일·영국 中 첨단기술 투자 제한…"일본도 적극 나서야"
지난달 말 영국은 중요 기술을 갖고 있거나 민감한 분야에 있는 자국 기업을 대상으로 한 해외투자에 대해 규제를 강화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그렉 클라크 영국 기업부 장관은 앞으로 산업 분야 및 기업 규모와 관계없이 외국인이 영국 기업을 인수할 때 정부가 승인 여부에 개입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이전에는 시장 점유율이 25% 이상이거나 인수규모가 1000억 정도 되는 규모일 때만 정부가 관여했던 데서 훨씬 규정이 까다로워진 것이다.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정부는 지난 1일 투표를 통해 중국 기업 ‘옌타이 타이하이’의 독일 기계장비·부품업체 ‘라이펠트 메탈 스피닝’ 인수를 허용하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불허 방침 발표 전 옌타이 타이하이 측이 이미 라이펠트에 대한 인수 제안을 철회할 것이라고 밝혔지만, 독일 정부는 부정적 입장을 강력히 밝히는 쐐기를 박은 것이다.
지난 2004년에 정부가 외국 기업의 투자를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법안을 제정했지만, 독일 정부가 합병을 허가하지 않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만큼 독일 정부의 위기감이 높아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번에 합병이 불허된 라이펠트는 자동차·항공 우주·원자력 산업 등에 쓰이는 고강도 금속 제품을 생산하는 선두 업체 중 하나다. 독일 정보기관은 지난 7월 중국의 독일 첨단 기술 기업 인수는 잠재적인 국가 안보 위협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일본의 영자 경제지인 니케이아시안리뷰는 "이번 무역전쟁의 본질은 바로 기술전쟁이며, 미국은 기술과 안보에서의 주도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하고 있다"면서 "중국의 도를 넘어선 지적재산권 침해와 강제적인 기술 이전은 유럽과 일본이 크게 우려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일본과 유럽과도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결국 선진국들은 중국에 함께 대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리뷰는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심화할 경우 일본과 유럽도 어떤 식으로든 대응에 나설 필요가 있을 것"이라면서 "특히 미국은 동맹국들의 첨단 기술 특히 군사기술이 중국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도록 대책을 요구할 것이며, 영국과 독일의 첨단기술에 대한 중국 투자 제한처럼 일본도 비슷한 조치를 검토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인도·러시아 등 "중국과 기술개발 함께"
지난달 26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열린 제10차 브릭스 정상회의의 핵심 주제는 4차 산업혁명을 통한 국가 성장과 공동 번영이었다. 개발도상국들이 상대적으로 뒤처진 정보기술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하자는 취지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당시 연설에서 "제4차 산업혁명, 혹은 디지털 혁명은 BRICS 회원국들을 포함한 전 세계 모든 국가의 발전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라면서 "디지털 경제 건설 문제에서 BRICS 국가들 간의 긴밀한 협력 관계를 마련하는 것은 회원국들의 협력의 질과 양을 높이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마우리시오 마크리 아르헨티나 대통령, 시릴 라마포사 남아공 대통령 등은 이 자리에서 미국의 보호무역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개방되고 포괄적인 다자무역체제를 지지하는 선언문에 서명하면서 연대하는 모습을 보였다.
신흥경제 5개국 모임인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국책 개발은행들이 블록체인 기술을 공동연구하기로 하는 등 기술 면에서의 협력을 강화하는 모습도 보였다. 중국을 중심으로 뭉친 개도국들은 다자무역체제에 대한 강력한 지지와 함께 보다 개방적인 투자 등을 요구하면서 선진국의 강화되는 규제에 대한 공격을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고 외신은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