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수칼럼]길 위에 선 80년 기업, 길 위에 선 사람

2018-04-11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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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수 부국장 겸 산업부장

지난달 22일 삼성 창립 80주년. 우리나라 산업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크게 조명받아야 마땅했다. 성대한 축하 행사는커녕 이벤트조차 없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모습도 물론 볼 수 없었다. 내부 사내 게시판에 삼성의 지난 역사를 반추하는 80개의 사진과 영상물이 올라온 게 전부였다.

계속되는 악재가 이유였다. 삼성이 80주년 기념일마저 대충 넘어갈 정도로 움츠리는, 소극적이자 수세적인 행태가 이어지고 있다. 최순실 국정 농단 관련 대법원 최종심을 앞두고 있는데다 최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차명계좌, 삼성전자서비스 압수수색 등 검찰과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등 여러 기관들의 수사와 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진 삼성 3세 경영의 시작은 시련과 역경의 연속이다.

경영학자들은 삼성이 이같은 시련을 맞닥뜨린 게 오히려 이 부회장에게 약(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시련의 역풍을 이기고 따낸 성공이 더욱 빛난다는 것이다. 이재용 시대 개막 이후 따라다닌 경영자질에 대한 논란도 불식시킬 수 있다.

삼성이 우리나라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엄청나다. 삼성전자의 수출은 우리나라 총 수출의 21.3%(2016년 기준)에 달한다. 삼성그룹 16개 상장사의 코스피 비중은 30%(2017년말 기준)이다. 한국 1위 기업이 국내에서 뭇매를 맞는 사이, 글로벌 경쟁자들이 남몰래 웃는 건 자명한 일이다.

일본 언론이 인수한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재용 부회장이 지난 2월 항소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후 “한국 재판부가 대기업의 화이트칼라 범죄에 관대했던 과거의 관행을 되풀이했다”고 대립각을 세웠다. 앞서 2016년 ‘갤럭시노트7 사고’가 터졌을 때는 "이건희 회장의 입원 후 원맨에게 의존하는 한국 재벌 속성상 갤럭시노트7 사고는 예고된 것이었다"고 비아냥거렸다.

‘일모도원(日暮途遠)’이란 말이 있다. 해는 저무는데 갈 길은 멀다라는 의미다. ‘사기’의 ‘오자서열전(伍子胥列傳)’에 나오는 말이다. 검찰 등 국내의 압박은 계속되고 해외 경쟁자들은 삼성을 몰아세우고 있는데, 삼성은 반도체 이후 미래 먹거리를 마련하는 게 급하다.

삼성은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타인의 불행을 보면서 느끼는 기쁨)를 느끼는 경쟁자들을 보고 얼굴만 붉히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 않다. 이재용 부회장은 '뉴 삼성' 시대를 활짝 열고 그의 기업가 정신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정보통신(IT) 기업들은 빠르게 성장한다. 2006년 창업한 페이스북과 2003년 설립된 테슬라 등은 벌써 미국 증시 시가총액 10위 안에 든다. 하지만 망하는 것도 순식간이다. 최근 이들 기업의 주가가 폭락한 게 그같은 현실을 대변한다.

각각 페이스북과 테슬라를 이끄는 마크 저커버그와 일론 머스크는 미국 ‘안트러프러너(창업가)의 아이콘’으로 꼽히며 승승장구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업이 난관에 처하거나 사업모델 자체가 흔들리면서 주가가 급락했다.

삼성전자도 예외일 수 없다. 4차 산업 시대에서는 끊임없이 혁신하는 기업만이 경쟁 우위를 유지할 수 있다. 전문경영인 체제에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석방된 이후 삼성이 다시 공격적인 투자에 나선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기업은 시기에 따라서도 어려움을 겪는다. 지난 80년간 삼성의 성장 과정을 봐도 그랬다. 이건희 회장이 2세 경영의 신호탄을 쏜 1987년에도 삼성은 위기에 봉착했다. 당시 삼성 제품은 국내에서는 1위 브랜드였으나 세계 시장에서는 아류로 평가받았다. 중국과 미국 등의 추격이 날로 거세졌던 시기다. 

이건희 회장은 ‘신경영 선언’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 “양을 버리고 질을 향해라”. 삼성의 행동강령이 된 이 선언은 이건희 회장이 현장에서 직접 찾은 답이었다.

이재용 부회장도 현장에서 그 답을 찾고 있다. 출소 후 첫 공식 행보로 해외 출장에 나섰다. 지난달 22일 출국해 프랑스 파리와 스위스 제네바, 캐나다 토론토·밴쿠버, 일본 도쿄 등을 거쳐 지난 7일 귀국했다. 16일 만이다. 이 과정에서 이 부회장은 삼성의 미래 먹거리로 꼽아온 인공지능(AI) 분야 석학과 해외 핵심 거래선 등을 만난 것으로 전해졌다.

이를 두고도 말이 많다. 지난 2일 토론토의 식당에서 현지 셰프 등과 함께 찍은 사진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오면서 세간에서는 ‘식도락 여행’을 다닌 것 아니냐고 깎아내린다. 집에 칩거하면 대외활동에 안 나온다고 지적하고 해외출장을 떠나면 식도락 여행 떠났다고 몰아세운다.

국내 1위 기업이 여론을 신경 안 쓸 수는 없다. 그렇다고 기업시민으로서 역할을 포기할 수는 더더욱 없다. 차세대 사업을 발굴해 적극적인 투자와 고용 창출, 사회공헌 활동을 전개하는 것이 기업시민의 본분이자 의무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 삼성도, 이 부회장도 해외는 물론 국내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기업, 기업인에 당당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이름을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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